전체기사 목록
-
[중국한인역사] 서응호 4 - 중산국립대학 영문과 입학1926년 6월, 서응호는 페이잉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경영자인 미국인 부인에게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더니 미국으로 가는 여비만 조달하면 유학 중의 모든 경비는 보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여비를 조달하고, 국내 내연의 처와 결혼을 해약하기 위해 귀국하려고 했으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페이정중학교의 이학현이 서응호에게 인삼을 선물해서 서응호는 인삼을 팔아 여비 40여 원을 마련해 고향으로 갔습니다. 결혼은 해약을 했지만 미국으로 갈 여비는 마련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광둥에서 인삼 행상을 해서 미국유학 경비를 마련하기로 하고 여비 30원가량을 마련해 1926년 9월 하순 원산에서 출발해 10월 10일경 광둥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 중산대학교에서는 “유월 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단체명으로 한인 유학생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고 있었습니다. 광둥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1926년 1월,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중국의 혁명은 식민지ㆍ반식민지 민족, 피압박 민중과 통일전선을 형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정책에 의해 국립 중산대학교의 초대 교장 줘루(鄒魯, 1885~1954)는 동방 피압박민족을 지원하라는 국부(國父) 쑨원의 명을 받들어 한국, 베트남 및 대만의 청년을 대량으로 입학시켰습니다. 입학시험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학비를 면제하고 동시에 의복, 서적 등도 제공했는데 국립 중산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이 제일 많았습니다. 유월한국혁명청년회는 장지락(張志樂,金山,1905~1938)이 『아리랑』에 언급한 “조선 혁명 청년연맹”과 동일 단체입니다. “1926년 늦봄에 조선인의 모든 집단과 정파를 대표하는 중앙동맹체인 조선 혁명 청년연맹의 창립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즉석에서 300명의 회원을 얻었다. 이 연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다.” 발기인은 김충창(*金星淑의 이명, 1898~1969)과 김약산(김원봉의 이명, 1898~1958), 장지락이었습니다. 유월 한국혁명청년회는 광둥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담보해서 학교에 입학시키고 자격을 심사해서 취직도 주선해 주었습니다. 유월한국혁명청년회에 회원에 가입하면 광둥 국립대학교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학비와 식비도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응호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1926년 10월 말 유월 한국혁명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립 중산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국립 중산대학은 1924년 국립광둥대학으로 개교한 이래 1927년 4월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기 전까지 한인 유학생 57명이 재학했습니다. 1925년에 8명이 입학하고, 1926년에 38명이, 1927년에는 4명이 예과에 입학해서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의열단 경비는 늘 부족했습니다. 단원중 수입이 있는 자는 매월 수입의 1/10을 회비로 내고 수입이 없는 자는 10전이었습니다. 광둥에 오면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남북 만주 또는 조선 등지에서 경제적인 준비가 없이 무작정 광저우로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유월 한국혁명청년회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많았는데 광둥성 당부부로부터 학교 입학 지망자들의 이천 위안을 받아 쓰기도 했습니다. 1927년 4월 한국 독립운동계에 있어서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잘 진행되리라고 믿었던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렬된 것입니다. 중국국민당이 갑자기 공산당원을 속출하여 체포하고 숙청했습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월한국혁명청년회 동지들은 국민당에도, 공산당에도 소속된 자가 많았기 때문에 매우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당은 학살한 공산당원 명단을 발표하고 거리에는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표어가 도처에 붙었습니다. 상황은 급변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광저우는 전쟁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산당 활동에 대한 단속은 한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산대학교 측에서 유월 한국혁명동지회 앞으로 “종래 입학 허가한 조선인은 학력이 불충분하고 입학 후에도 성적이 부진하므로 향후 재학 중 식비를 징수하고 동지회에서 신입 희망자에 대해 먼저 자격시험을 치르게 하라는 요지의 통지를 보내왔습니다.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서 학교측과 몇 차례 교섭을 해서 식비 징수만을 종전대로 무료로 하되 한문, 수학, 영어 3과목은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서 시험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서응호는 중산대학 한인 입학 예비생들의 영어시험을 담당했습니다. 서응호는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 때 의열단 위원직을 사임했습니다. 학생이어서 의열단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1927년 7월 의열단 탈퇴원서를 작성해서 중앙집행위원장 앞으로 제출했는데 중산대학교도 국공 분열 후유증으로 잠시 폐교했습니다. 서응호는 페이잉학교 미국인 교사로부터 여비를 지원받아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왔습니다.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다가 영국인이 경영하는 버스회사 차표계에 월급 40원을 받고 취직했는데 77세 부친이 병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큰형은 15년 전부터 정신병이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형수가 품팔이로 어렵게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둘째 형도 작년에 죽었습니다. 서응호는 고 귀국하여 집안일을 돕기로 하고 1928년 5월말 경 다니던 버스회사를 사직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참고자료 「서응호 신문조서」(제2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鄒魯, 「祝朝鮮復國的回顧」, 『中央日報』(重慶),1945년10월,25일님 웨일즈ˑ김산,『아리랑』, 동녘, 2011년3월,魏志江,「中山大學과 한국독립운동의 관계」,『한국근현대사연구』2007년 봄호 제40집.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테마파크가 100여개 넘는 중국, 각 지역에서 디즈니를 “쟁탈”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최근 칭다오시 문화와 여행국 당서기, 국장 판펑(潘峰)은 '민생온라인'(民生在线)에서 디즈니랜드가 칭다오에 세워진다는 소식에 대해 디즈니랜드회사와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다며 답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디즈니랜드측은 칭다오에 랜드가 세울 계획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외에 우한, 천진, 청두 등 도시도 디즈니와 관련 소식이 나왔었다. 중국에 세 번째 디즈니랜드가생길까? 중국테마파크연구원 원장 임환걸(林焕杰)은 인터뷰에서 디즈니의 “명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행객 입장에서 보면 “디즈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테마파크 브랜드이고 도시 발전 측면에서 봤을 때 디즈니랜드가 생기면 현지의 경제, 오락, 교통, 음식, 호텔 등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임환걸은 “디즈니의 이념은 제품이 소중하고 희소성이 있어야 오래동안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디즈니랜드는 국가 및 지역별 여행객수와 시장에서 받아들이는 정도 및 경쟁 상황을 고려한다'며 소개했다. 현재 디즈니랜드는 미국 캘리포니아, 플로리다주,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중국 홍콩과 상해에 위치해 있으며 2016년도에 오픈한 상해 디즈니랜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나이가 젊은 디즈니테마파크이다. 그러므로 임환걸은 '디즈니가 중국에서 세번째 디즈니랜드를 오픈한 가능성이 높지 않다. 만약 새로 오픈하게 되면 자신과 경쟁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며 지적하였다. 디즈니랜드가 인기 많은 이유는? 국제테마엔터테인먼트협회 TEA(Themed Entertainment Association) 공동인프라컨설팅기업 AECOM이 발간한 최신 보고서 “2021 글로벌 테마파크 및 박물관 보고서”(2021 Theme Index and Museum Index)에 따르면 2021년 세계 랭킹 25 위 안에 든 테마파크 중 상위 10 위 안에 5 위인 일본 유니버설 스튜디오(日本环球影城)와 8위인 장롱해양왕국(长隆海洋王国)을 제외하면 8개가 “디즈니 아이템”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디즈니매직킹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디즈니랜드, 도쿄 디즈니랜드, 도쿄 디즈니해양공원이 4위를 차지했다. 방문객 수를 보면 미국 플로리다주의 디즈니매직킹덤은 2021년 연간 1269.1만명, 코로나 19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에는 2096.3만명으로 전 세계 다른 테마파크를 압도했다. 중국에 대형 테마파크가 부족한가? “2021 글로벌 테마파크 및 박물관 보고서”에 따르면 장롱해양왕국은 10위인 상하이 디즈니랜드보다 높은 8위를 차지했다. 장롱해양왕국의 2019년 방문객은 1173.6만명으로 상하이 디즈니랜드의 1121.1만명을 넘어섰다. 또한 베이징 환러구(北京欢乐谷)와 광저우장롱환러월드(广州长隆欢乐世界)도 각각 24위와 25위를 차지했다. 미래 세계 테마파크의 주전장은 중국이다 디즈니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세계적인 테마파크가 들어선 것도 국내 테마파크의 발전을 이끌었다. 프로젝트 협상부터 개장까지 16 년이 걸린 상하이 디즈니 리조트의 개장 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대형 테마파크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시장에 접근해야 한다는게 임교수의 지적이다. 디즈니의 테마파크 계획은 보다 인간적이고 상업적이며 합리적이다. 최근 몇년 중국의 테마 파크도 특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그중 화챵팡터(华强方特)는 현재 국내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이다.
-
민주평통 베이징협의회, 해외청소년 통일골든벨 대회 개최북경한국국제학교와 천진한국국제학교에서 예선 통과한 재외동포 청소년 50명 출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베이징협의회(회장 서만교)는 지난 6월 4일 오전 10시 천진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2023 해외청소년 통일골든벨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에는 북경한국국제학교에서 예선을 통과한 25명과 천진한국국제학교에서 예선을 통과한 25명 등 총 50명의 재외동포 청소년들이 출전했다. 북경한국국제학교는 지난 5월 10일 재학생 380명이 참가한 가운데, 천진한국국제학교는 6월 1일 재학생 240명이 참가한 가운데 예선을 개최한 바 있다. 베이징 본선대회에는 민주평통 베이징협의회 서만교 회장과 자문위원들, 천진지회 신원칠 회장과 자문위원들, 천진한국국제학교 이장범 이사장과 신진수 교장, 박홍희 천진한국인(상)회장 등도 참석해 학생들을 응원했다. 이번 대회에서 총 50문제가 출제됐다. 이중 40문제는 사전에 배포된 기본학습문제에서 출제됐고, 10문제는 주중한국대사관 마삼민 통일관이 출제한 비공개 문제였다. 1등은 천진한국국제학교 서동현 학생이 차지했다. 2등은 이경민 북경한국국제학교 학생이, 3등은 김동현 천진한국국제학교 학생이, 4등은 박지윤 북경한국국제학교 학생이 차지했다. 이 학생들에게는 7월 18~21일 한국에서 열리는 해외 본선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이날 대회 중간에는 북경한국국제학교 태권도부의 태권도시범, 천진한국국제학교 오케스트라단의 연주, 북경한국국제학교 송승영 학생의 고쟁연주, 천진한국국제학교 댄스부의 K-POP댄스공연 등도 있었다. 자료제공: 민주평통 베이징협의회
-
제19기 문화박람회(文博会) 코로나 이후 보안싸징국제전시회장에서 재개최최근, "중국 문화산업 제1전"(中国文化产业第一展)이라고 불리는 제19기 문화박람회가 심천에서 열렸다. 첫날 전시회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했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9호관의 심천신문업그룹 전시관에서는 문화산업 성과를 전방위적으로 전시하였고 각 지역 전시관도 현지 문화를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12호관 상하이 전시구역의 첨단 기술을 통해 상하이의 모습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10호 랴오닝관(辽宁馆) 블랙테크놀로지요소 '폭발', 로봇, 기계운동에너지호랑이… 11호관 웨강아오따완취관(粤港澳大湾区馆) 주해전시구역의 주해민족관현악단은 민족기악 "해조"(海潮)," 월풍"(粤风) 등 창작곡을선보였다. 12호관의 티베트 전시구역은 "라싸의 사랑"(拉萨之恋)이라는 노래와 춤으로 관객들의 발길을 잡았다. 9호관 웨이팡(潍坊) 전시구역에서는 거대한“용머리”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용의 몸”이 지붕을 맴돌고, 각양각색의 연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13호 전시관 섬서(陕西) 전시구역에서는 "장안 12시진"을 창의적인 주제로 섬서 문화창의제품(文创产品), 무형문화재전시품(非遗展品) 서북 현지 음식을 전시하였다. 10호관에서는 현장에서 인쇄화(印刷画) 제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심천 국제 전시회장(보안)은 심천보안 국제공항, 푸융부두(福永码头), 광선고속도로와 인접해 있어 여러 교통수단을 통해 쉽게 전시회장으로 찾아갈 수 있다. 전시회 시간: 2023년 6월 7일 ~ 6월 11일 (수요일 ~ 일요일) 전시 시간 6월 7일 10:30-18:30 6월 8일-10일 09:30-18:30 6월 11일 09:30 ~ 18:00 전시관 안내 디지털문화관 (9호관) 문화산업종합관 A관(10호관) 웨강아오 따완취관(11호관) 문화산업종합관 B관(12호관) 문화관광소비관·일대일로 국제관(13호관) 무형문화재·공예미술·예술디자인관(14호관) 이동 안내 지하철: 지하철 12 호선, 20 호선을 타고 젠베이역(国展北站) C1,C2 출구 버스: B892선 (운영시간: 6:30 ~ 21:30) 하차역: 심천국제전시회장②, 국전지하철역②(国展地铁站) M515선(운영시간: 6:30 ~ 22:00) 하차역: 심천국제전시회장②, 국전지하철역② 615선(운영시간: 6:00 ~ 21:30) 하차역: 국전지하철역①, 심천국제전시회장① 택시/인터넷예약택시(网约车): 젠베이역(国展北站) C1,C2 출구에서 하차
-
샤오롱샤(小龙虾) 배탈주의, 생명 위험 경고까지알려!!최근, 자정 12시면 청두제2인민병원 피부과 응급실은 샤오롱샤를 먹고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킨 환자들로 수두룩하다. 벌써 한 달째 매일 10~20여 명의 환자가 줄을 서고 있고, 샤오롱샤를 먹고 응급실까지 실려온 환자도 있다. 24세의 주모는 친구와 야식으로 샤오롱샤(麻辣小龙虾)를 양재기로 많은 량을 먹어 치웠다. 몇시간 뒤 갑자기 온 몸이 가렵고 아프면서 붉은 두드러기가 생기면서 메스껍기까지 했다. 친구는 급기야 그를 청두시제2인민병원으로 데려 갔고 그때 그는 입술이 부어오르고 전신에 피진에 말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고 손과 발은 부어오르고 숨도 잘 쉴 수가 없었다. 알레르기치료과정을 거친후 주모의 피진은 선명하게 개선되고 호흡곤란도 완화되었다. 피부과 주치의 멍의사는 '샤오롱샤를 먹어 생긴 두드러기다. 샤오롱샤철에 들어서면서 매일 저녁 10여 명에서 20여 명 환자를 접수한다. 심각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전했다. 절강 이우 28세의 샤오라오(小楼)는 샤오롱샤를 네마리밖에 먹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샤오롱샤를 먹고 저녁 10시쯤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8시 좌우에 출근하고 심한 구토를 하였고 그리고 무기력하고 어지럽고 사지에 두드러기가 생겨 직장동료가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말하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샤오라오의 증상이 비교적 심각하다'며 '조금만 늦어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응급실에 왔을 때 혈압이 60/30밖에 되지 않아 바로 알레르기성 쇼크라고 판단했다'고 소개했다. 의사는 샤오롱샤 체내에 이종외래단백(异种外来蛋白)이 있으므로 일부 사람들에게 이종외래단백에 알레르기반응을 보인다. 만약 대량 식용했을 경우 이종단백이 체내에 누적되면서 lgE항체가 생긴다. 하지만 lgE는 인체의 코, 인후, 기관지, 피부 등 임프세포에 있기 때문에 알레르겐과 lgE가 결합해 항원항체반응이 일어나면서 피부에 두드러기가 생기도 인후가 붓고 혈압이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알레르기가 있는 인원 외에 소화기능이 약한 자, 요산이 높고 통풍이 있는 자, 당뇨병 환자, 임산부, 어린이, 노인 등 면역력이 좋지 않는 사람들은 샤오롱샤를 적게 먹거나 삼가해야 한다.
-
위챗 모멘트에 금지품 판매광고 함부로 올려서는 안돼"위챗 안전센터"는 위챗 개인계정의 금지품 판매정보 발표에 관한관리공고를 발표했다. 위챗은 안전하고 건강한 친환경적인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위챗팀은 위챗 개인계정을 이용하여 특정상품판매정보(예를 들어 담배, 전자담배 등)를 발표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금지품판매정보(예를 들면 최음약, 불법 보건품 등)를 발표하는 행위를 포함한 금지품 판매정보 발표행위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위법 행위는 사용자의 정상적인 사용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기 등 악의적인 행위를 쉽게 파생시킬 수 있다. 위챗 개인계정의 정보발표행위를 규범화하고 위챗 사용자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위챗 개인계정은 어떠한 형식으로도 각종 "금지품" 판매 정보를 발표, 전시, 전파하는 경우 위챗팀은 국가 관련 법률과 규정에 따라 단속할 것이며 그외에 "텐센트 위챗 소프트웨어 허가 및 서비스 계약", “위챗개인계정사용규범"에서 규정한 정도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초기 또는 일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경고 메시지 또는 기능 제재가 적용된다. 여러 차례 또는 심각하게 법규를 위반했을 경우 관련 계정에 대해 제한 처벌이 뒷따른다. 2023 년 1 월부터 현재까지 사용자의 신고 증거를 확인한 결과 “금지품”판매 정보를 게시한 위챗계정 7,236개, 위챗 그룹채팅 1,871개에 대해기능 사용 제한이나 로그인 제한 등 처벌을 내렸다. 공민이 인터넷에서 불법 금지품을 판매하는 행위는 “형법”, “치안관리처벌법” 등 관련 법규를 위반한 행위에 속한다. 사용자가 개인계정, 그룹, 모멘트 등 기능을 통해 불법 금지품 판매정보를 올리는 것 역시 위법 행위에 속한다. 친구를 도와 모멘트, 위챗그룹에 불법 금지품을 전달하여 홍보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양자가 모두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위챗을 사용할 때 주동적으로 금지품 및 특정 상품의 판매범위에 대한 국가의 법률규정을 따르고 관련 법률법규 및 플랫폼규범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담배판매허가증관리방법"규정에 근거하여 정보네트워크를 통하여 불법으로 담배를 판매해서는 안되며 감독관리부문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규정을 위반하고 약품 또는 의료기기의 홍보 내용을 발표해서는 안된다. 위챗팀은 위법 및 규정 위반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플랫폼 관리를 전개하는 동시에 법에 따라 관련 부서에 협조하여 공동 단속할 것이다. 만약 위챗을 사용하면서 위법 행위를 발견하면 즉시 클라이언트(客户端) 또는 텐센트 가디언즈애플릿(腾讯卫士小程序)을 통해 신고할 수 있다.
-
[중국한인역사] 서응호 3 - 의열단 가입페이잉학교에 재학하던 중 중산대학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으로부터 의열단 재무부장 권준(權晙, 1895~1959)을 소개받았습니다. 권준은 산책하자고 중앙공원으로 서응호를 데리고 갔습니다. 권준은 서응호에게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이 있는데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라도 조선 독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없을 테니. 당신도 그것에 가입하여 서로 독립을 위해 노력하자”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서응호는 학업을 목적으로 도항한 자이고 나 같은 학생이 그것에 가입해도 별로 의열단에 이바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권준은 “학생들도 많이 가입해 있다. 또 가입한다 해도 반드시 건물을 파괴하거나 대관을 암살하는 게 아니라 각 사람 나름대로 합당한 활동을 하면 되니 꼭 가입하라”고 간곡하게 권면을 해서 서응호는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가을,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원이 약 60여 명이었습니다. 김원봉이 의열단 본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의열단원을 인솔해서 광저우로 왔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 12명이 황푸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고 또 일부 단원 10여 명은 중산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리하여 1926년 말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은 약 100명이 넘었습니다. 1927년 봄에는 광저우에 집결한 한인은 8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일부 중학생은 열너덧 살밖에 안 되었고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중국의 관내 및 동북 지역, 그리고 소련, 일본 등지에서 중국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광저우를 찾아온 유능한 청년 지사들이었습니다. 한국의 활동적인 젊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거의 광저우에 집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약 250명이 중산 국립대학과 황푸 군관학교에 학적을 두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페이정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산대학교에 입학한 서응호는 실력이 있다고 교민들로부터 꽤 신임을 얻은 편이었습니다. 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열단은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김원봉은 “종래 의열단은 대관 암살과 건축물 파괴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고 일반의 비판을 듣는 바, 장래에는 단원을 중국 군대에 입대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이들을 남북 만주에 산재해 있는 각 독립단체에 보내어 단원의 군사훈련을 지도 교양하고 조선 내에 밀파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게 한다는 취지를 발표했습니다. 또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얻기 위해 의열단 창립 이래 조선 독립을 위해 단원들이 활동한 실적, 중국혁명군에 입대하여 활동한 공적과 상황을 연혁으로 만들고, 중국혁명의 완성이 조선 혁명운동에 이익이 되는 이유를 서류로 작성하여 중국국민당 광둥성 당부에 제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926년 12월, 제2차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응호는 재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새롭게 구성된 의열단 집행위원들은 의열단의 취지 강령을 선전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연락을 유지할 방법으로 매월 1회 「우리들의 道」란 제목으로 의열단 단보를 발행했습니다. 의열단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지만 의열단 단보 1호를 반지판(半紙版) 8면짜리 150부를 인쇄하여 광둥, 상하이, 한커우 있는 단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2회「의열단보」는 경비가 없어서 3월 중순에 80부를 인쇄해서 배포하고 3회부터는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단원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광저우 상하이, 한커우, 베이징 및 한국과 러시아 내에 지방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내에 소재하는 입오생부에 지방부를 설치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광저우 지방부 책임 간부로서 1927년 4월 중산대학 문과 강당에서 의열단 단원 약 20명을 집합시키고 광저우 지방부 대회를 열었습니다. 광저우 지방부가 조직된 경과를 보고하고, 신입 단원 소개 및 중앙집행위원회 결의 및 논의 사항 등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원 훈련 방법으로서 각자가 항시 혁명 사상 함양에 힘쓰고 이에 관한 서적과 신문 잡지 등의 구독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가끔 토론회를 열어 지식 교환을 할 것을 권했습니다. 참고자료 서응호 공판조서 1939년 11월 29일님 웨일즈ˑ김산, 『아리랑』, 동녘, 2011년3월.「서응호 신문조서」(제2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서응호 2 - 서응호는 어떻게 광저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서응호는 고향인 함경남도 덕원군(德原郡) 적전면(赤田面) 신풍리(新豊里)에서 소학교와 중학을 졸업했습니다. 이어 원산(元山) 공립보통학교와 원산 보광(保光)학교 고등과도 졸업했습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응호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자형과 누나가 있는 간도(間島) 롱징(龍井) 쥐즈가(局子街, 현재의 옌볜)로 건너갔습니다. 누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장사를 하고 자형은 롱징의 푸차오 신한촌(浦潮 新韓村) 일본 헌병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서응호는 롱징에서 여인숙을 경영하기도 하고, 일본 영사관의 통역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며 모종의 운동을 계획하다가 다시 원산으로 돌아와 덕성학교(德成學校)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취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해서 전분 회사, 협동운송부 등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다가 1919년, 롱징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창제(昌濟)병원에 통역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창제병원에 근무하면서 서응호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나가 유학경비로 매월 40원씩 보조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업이 실패해서 약속한 학비 지원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낙담해 있던 중 중국 상하이는 학비가 적어도 공부할 수 있고 또 미국으로 도항하기도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상하이로 가기 위해 창제병원을 사직하고 그간 저축한 돈 80원을 여비로 삼아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921년 3월, 서응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도착했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 여기저기 무위도식하던 중 식당을 운영하는 선우혁(鮮于赫, 1883~1985)의 부인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인성학교 교사 합숙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서응호는 8월까지 그 숙소에서 자취하며 전심으로 영어를 독학했습니다. 마침 미국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삼육대학 토목과는 첫 한 학기 학비만 내면 그 후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부모님께 간청했더니 마차를 팔아서 학자금 100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삼육대학에 입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동포가 자기도 고향에서 200원이 곧 송금되는데 돈이 도착하면 갚을 테니 빌어달라고 애걸해서 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포는 고향으로부터 돈을 받고도 갚지 않아 결국 서응호의 삼육대학 입학은 무산되었습니다. 1921년 9월 상순, 학비가 무료인 광둥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여운형(呂運亨, 1885~1947)이 광둥 독군(督軍) 천죵밍(진형명, 陈炯明, 1878~1933)과 중국인 목사 장 모 씨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소개장을 받아 본 장 목사는 현재 쑨원이 광둥성을 진격하는 중이고 천죵밍은 매우 다망하므로 본인의 소개로는 천죵밍을 면회할 가망이 없으니 영남대학 교장 종롱광(锺荣光, 1866~1942)을 통해서 천죵밍 면회를 신청해 보라고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서응호가 장 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종롱광 영남대학 교장을 방문했습니다. 그 무렵, 쑨원은 광시 군벌 루잉팅(陸榮廷, 1859~1928)을 베트남으로 쫒아내고 지속적인 북벌 전쟁을 구상하는 중이었습니다. 종교장은 현재 전쟁 중이라 비행학교는 폐쇄 중임으로 시국이 안정되면 입학하라고 권고해서 비행학교 입학도 무산되었습니다. 서응호가 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한다고 하자 김상훈이 6개월분 학비와 월사금을 지원해 주어서 1922년 3월, 미화(美華)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수료하고 다음 학기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상하이로 갔습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와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신 정유린(鄭有隣) 집에 기거하면서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경영하는 남화(南华)학원에 입학해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남화학원에서도 학비를 낼 수 없어서 1923년 3월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광둥에 있는 김상훈이 자신이 재학 중인 페이잉(培英)학교 교장에게 서응호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더니 교장이 동정하여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광저우로 오라고 연락했습니다. 서응호는 다음 날 상하이를 출발하여 광저우로 왔고, 광저우에 온 지 약 4~5일 후에 페이잉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本町署(본정서)에 檢擧(검거)됐든 의열단사건진상(義烈團事件眞相)」,『동아일보』, 1929년 11월3일.「서응호 신문조서」(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陳錫祺 主編,『孫中山年譜長篇』下冊, 中華書局, 2003년11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서응호 1 - 서응호가 졸업한 페이잉중학교광저우시 팡춘 바이허동(白鶴洞) 페이잉(倍英)중학교는 광저우에서 손꼽는 중점학교입니다. 1920년대, 가난해서 학비가 없었던 고학생 서응호가 미국인 교장의 특별후원으로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학교입니다. 서응호의 학구열이 뜨겁기도 했지만 외국인 학생을 받아준 교장이 고맙기도 하고 페이잉학교 교정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2013년 12월 29일, 바로 10년 전 이맘때 페이잉(倍英)중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캠퍼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지라 멀리서라도 교정을 한번 보겠다고 갔는데 마침 교문은 살짝 열려 있고 수위가 자리를 비웠네요. 태연자약하게 마치 학교에 볼일이라도 있는 듯 교문을 들어섰습니다. 겨울이지만 사계절이 늘 푸른 광저우, 그날은 햇살이 따스해서 마치 봄날 같은 겨울 오후였습니다. 교문을 들어가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 눈앞에 동화를 보는 듯한 아기자기한 5층 종탑이 나타났습니다. 주황색 유리 기와의 팔각 원형지붕 아래 옛날 시골에서 보던 교회 종이 달려 있네요, 아래층에는 붙박이 시계와 “信(신), 望(망), 愛(애)”라는 세 글자, 연세대학교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독수리 형상, 자그마한 미닫이 창문, 기독교적 함의가 물씬 풍기는 종탑입니다.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보고 오면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페이잉중학교는 1866년 미국장로회에서 중국으로 파송한 나하례(Willian Dean Noyes ~1914) 목사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목사 가정에서 성장한 나하례는 중국의 태평천국이 기독교로 시작되었으나 총칼로 통치하다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알고 중국에 제대로 성경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1866년 30세가 된 나하례는 부인과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109일간 소형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홍콩을 경유해서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1년이 못되어 죽고 나하례마저 큰 병에 걸렸습니다. 나하례의 동생 나하리(Harriet Newell noyes ?~1924)가 인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올케가 죽고 오빠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빠를 돕기 위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나하례는 광저우에 온 지 10년이 지나서야 교회를 시작하고 1879년 광저우시 사지(사기, 沙基) 통더대가(동덕대가, 同德大街)에 안화당(安和堂)이라는 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후 1887년에 팡춘 청송원(聽松園) 부지 1만 평을 사고 안화당 학교를 이전하여 페이잉서원(培英書院)으로 개명하고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나하리는 1872년 부녀자와 여자아이 6명을 데리고 페이잉서원과 인접한 곳에 진광(眞光)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구절 중에 “참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근거로 학교 이름을 “진광(眞光)”이라고 지었습니다. 나하례의 여동생이자 나하리의 언니 마샤(Martha Noyes, 1840~1925)도 1873년에 광저우로 왔습니다. 그때 마샤는 33세 미혼이었습니다. 동생이 운영하는 진광학교를 돕고 미국 북미장로회가 설립한 박제의원(博濟醫員)에서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현재 손중산기념병원 “중산대학 제2병원”의 전신이 박제의원입니다. 박제의원을 설립한 켈(John G.Kerr) 목사의 두 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46세의 마샤는 켈과 결혼했습니다. 마샤는 결혼 후 진광학교 사역을 그만두고 남편과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이 되는 혜애(惠愛) 병원을 팡촌에 설립했습니다. 나하례는 48년간 사역을 하고 1914년 1월, 78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 페이잉중학교의 5층 종탑이 들려주는 나하례 목사 삼 남매가 광저우에서 실천한 “신ˑ망ˑ애” 이야기입니다. 참고자료 김현숙 지음, 『시님의 빛』, 황금종, 2011년 7월
-
[인터뷰] 앞선 한국기술을 중국 규모 경제에 싣어 사업성공, 거인스마트크레인 윤용기 대표윤용기 대표는 현재 중국 크레인업계 선두, 거인그룹과 공동투자 합작사인 중한스마트크레인제조유한공사(巨人中韩智能制造有限公司) 대표로 한국 무인자동화 크레인 기술을 중국 크레인 시장에 확장시키고 있는 애국 인물이다. 그는 중국지도에 1,000여개 제철소 위치에 점을 찍으며 한국 십여 개 밖에 안되는 제철소 시장과 비교, 중국 규모의 경제에 바로 감을 잡았다. 2015년 당시 한국 제철소에서 사용되는 크레인들이 일찍이 무인자동화 크레인으로 도입된 것에 반해 중국 크레인 업계는 무인화 보급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이를 보고 한국의 기술력을 중국 크레인 업계에 장착하는 사업구상을 하게 되고 당시 <중국제조 2025>를 분석하며 사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거인스마트크레인은 최근 중국경제 상황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한중기업 합작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합작사 리더로서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고 경영하는가? ‘성장동력’,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매일 시간을 내어 이 두 단어가 사업과 조직에 어떤 역할을 하고 적용을 할 것인지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함께 하고 있는 거인그룹의 경영과 미래의 성장동력을 찾는 것이 주요 업무이며, 직원들한테도 이 두 가지를 위한 가치와 사고를 끊임없이 이끌어 내어 나만의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내 자신을 위한 숙제이기도 하다. 거인스마트크레인은 중국시장에서 어떤 우의를 갖고 있는가? 거인 무인자동화크레인은Pilot 현장을 운영한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각각의 고객들이 갖는 현장의 환경을 Pilot공장에서 먼저 재현하고 그 결과를 각 현장에 공급한다. 시간적인 안정과 함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합작사6년차를 보내며 중국사업을 잘하기 위해 특별히 힘쓴 것이 있다면? 특별히 없다. 단지 중국문화를 가장 기초로 두고 생각한다. ‘중국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것이 보여진다’라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짜증날 것도 없고, 화 날일도 없다. 모든 것을 즐거운 기대감으로 받아들인다. 과거 중국 기차여행으로 단련된 그들의 중국문화와 습관의 이해가 어느덧 나의 무기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중국 사업도 문화로 접근해 갔을 뿐이다. 중국 친구들과 인연이 사업을 만들어줬다. 중국인 친구들과 10년, 20년지기 친구들이 많다.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도 과거 나의 제자이다. 꽌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꽌시가 ‘안되는 것을 되게 할 수 있는 불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은 위험한 해석이다. 꽌시는 믿음의 출발이며 상생의 원천이다. 하루 최소 10분이라도 독서에 몰입한다. 하루라도 손에서 책을 놓으면 죽은 목숨과 같다는 마음으로 자기관리를 위한 노력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중국시장에 관심있는 사업자가 있다면? 한국의 앞선 기술력 아이템이 있다면 도전하라고 하고 싶다. 아이템을 가져와 좌판(플랫폼)에 깔아 놓고 팔려고만 하는 생각과 방식은 끝났다. 반드시 사업 강점을 드러내어 고객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 고객을 찾아오게 하는게 어렵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중국을 싫어하면서 중국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팔려고만 하는 사업 마인드와 같다. 아이템의 고객을 연구하고 부가가치를 올려야 한다. 결국은 중국을 좋아하고 그들과 깊은 교감을 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2% 부족함이 있어도 중국인들은 새로운 것의 시도가 아주 강하다. 그들이 부족한 2%를 난 한국 기술력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중국의 규모의 경제는 아직도 많은 곳에 있다. 아직도 연해지역으로 한국 사업자들이 집중되어 있는데, 중국 3, 4, 5선 도시를 뉴스나 자료에서만 보지 말고 직접 찾아 가서 부딪쳐라. 모방을 두려워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사업은 힘들다. 모방을 기뻐해라, 끊임없이 혁신을 하게하는 원동력으로 사용하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거인스마트크레인 홍보영상 관람 인터뷰를 마치며 윤용기 대표가 보는 중국, 그의 사업 마인드에서 ‘희문락견(喜闻乐见)’ 기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반기다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그의 중국 사랑은 중국 지방정부가 명예시민으로 인정할 정도로 뜨겁다. 많은 기업이 중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윤용기 대표는 한국기술이 앞서 있는 업종이라면 중국에는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강조한다. 윤용기 대표 오랜 제자이며 현재 함께 일을 하고 있는 형요룡 과장과 거인스마트크레인 설비 현장 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