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채원개장군(2) 대한독립단 군사 훈련 교관

[중국한인역사] 채원개장군(2) 대한독립단 군사 훈련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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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사진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무렵, 채원개는 고향 평안남도 영월군에서 안식일 교회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명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라”라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의명이라 이름을 짓고 청교도 정신으로 운영하던 학교입니다. 
 
의명학교를 졸업한 채원개는 1910년 서울 오성학교에 입학했는데 오성학교는 1908년 서북5도의 서북협회 지도자들이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서북협성학교가 전신이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과 민족교육을 표방한 학교입니다. 

오성학교가 패쇄되자 채원개는 1915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서 4년간 복무했습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황실보호 명목으로 약 200명을 남긴 조선보병대입니다. 조선보병대에 근무하던 중, 1919년 3ˑ1운동이 발생하여 고향 영원에 가서 고향친구들과 모의하고 군민을 규합하여 3월 28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서 탈옥한 채원개는 장진과 강계 등지에 잠시 피신해 있던 중 상하이에서 오는 사람을 통해 상하이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정화을 듣고 북만주행을 결심했습니다. 북만주로 가는 길에 통화현 콰이다마오즈(快大茂子) 신흥학교 분교에 들렀는데 조선 보병대 동료 강노국 참교가 교관으로 있었습니다. 강노국이 채원개에게 신흥학교에 남아서 군사훈련을 시키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산웬푸(三源浦) 대한독립단 본부를 찾아가서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1872~1922)를 만나 북만주행을 접고 대한독립단 교관으로 입단했습니다. 

대한독립단이 조직되기 전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박장호(朴長浩, 1876~1921), 백삼규(白三圭, ?~1920), 조맹선(趙孟善,?~1922), 전덕원(全德元, 1877~1943),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등이 만주에 정착했습니다. 초창기 만주에 온 의병들은 첩첩산중에 집을 지어 사냥이나 벌목으로 업을 삼고, 쌀이 없어 감자와 콩을 먹고 살면서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항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의병장들은 만주 일대에 분산하여 교민들을 다스리는 한편 정보원들을 국내로 보내 일본의 군사정보를 탐지하고, 주요시설을 파괴하거나 유격전을 펼치고 대한제국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한일합병 이후 10여 년간 의병 활동은 별 진전이 없었지요. 

1919년 삼일 만세 운동이 일제의 군화와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자 십여만 명의 1919년 3월 15일, 기회를 기다리며 흩어져 활동하던 의병 지도자들과 유림인사 560여 명이 류허현 산웬푸 시거우(西沟) 대화셰(大花斜)에 모였습니다. 지금까지 의병장들이 산발적으로 운영하던 기존의 향약계, 농무계, 포수단 등을 하나로 통합하고 밀려오는 망명객과 열혈 청년,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사는 한민족 청소년까지 규합하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했습니다. 압록강 대안 남만주는 지리적으로 국내에 유입되는 청년들을 쉽게 흡수하고 또 이들이 국경지대를 교란하거나 국내에 침투해서 유격전을 전개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채원개는 출동 부대 책임자로 독립군 1개 중대를 급편성해서 국내로 진입해서 압록강 변에서 10여 차례 유격전을 전개하며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11월 9일 새벽 영변군 고성면 북쪽 산속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이다가 채원개는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관뎬현(寬甸縣) 샤오야허(小雅河) 임시기지로 철수했습니다. 기지라고 하지만 병사(兵舍)도, 훈련장도, 시설이 없습니다. 피복이란 바지·저고리 1벌, 배낭 1개, 짚신 1켤레, 두건 1개였으며, 주식은 옥수수와 좁쌀밥, 반찬은 된장과 소금이었고 막사는 산속 숲속에 나뭇가지와 풀로 만든 천막입니다. 

채원개는 심산에서 청년들을 훈련해 영원, 창성, 의주, 삭주 등 평안도 일대로 보내고 대한독립단의 국내에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독립군들은 낮에는 숨어 있다가 야간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대한독립단이 워낙 맹활약을 하니 압록강 일대에서 일제와 협력하던 헌병보조원 면서기 등 친일파들이 관복을 벗고 탈주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는 일도 속출했습니다. 

참고자료 
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년 12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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