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형제골프회 초대 회장 박용남 회장 - 진정한 골프매니아 가족 중심, 사업 중심

[인터뷰] 형제골프회 초대 회장 박용남 회장 - 진정한 골프매니아 가족 중심, 사업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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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골프회 초대 회장

박용남 회장


■ 고향:길림성 룡정시  I 1969년생

■ 기업:深圳市佳马钟表有限公司

■ 골프 구력: 21년


천지개벽의 심천 발전이나 광동의 빠른 경제발전 속에는 일찍이 80, 90년대 꿈을 찾아 광동으로 모여든 전국 청년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심천, 광주, 동관, 혜주, 중산 등에는 조선민족 뿐만 아니라 전국의 60, 70后가 오피니언 리더의 중심이 되어 있다. 


광동 조선민족 골프 모임의 창시자 박용남 회장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은 중국 패션시계 업계에서 선두를 달리며 매출 5억원 이상을 자랑하는 줄리어스(聚利时, Julius) 시계의 중견기업 회장이지만, 그 역시 1988년 청년 드림을 꿈꾸며 심천 기차에 올라 탄 것이 어언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의 고향은 연변 룡정으로 해란강, 일송정, 윤동주 생가와 가까운 곳으로 유명하다. 18살 대학 진학 준비자금 700원을 어머니께 받아 학원으로 가야할 길을 돈 벌 궁리의 준비자금으로 챙겨 심천으로 줄행랑을 쳤다. 박용남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이미 연변일보나 여러 매스컴에 많이 알려 진 것처럼 ‘도전, 인생 역전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골프 시작은 1999년도, 그가 심천에 온지 1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30살에 커피숍을 운영할 때, 우연히 한국인 사장과 인연이 된 것이 골프도 시작하게 되고 시계사업 외길도 걷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시계줄 조립공장, 완구공장 일을 거쳐 연변 무역부 임원, 한국 옷 도매사업, 커피숍 사업 등 그야말로 파라만장한 삶을 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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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골프채는 선물받은 것이 있었어도 한 쪽에 진열품으로 세워 놨다가 갑작스럽게 연습장도 한 번 가보지 않고 바로 필드에서 처음 잡았다. 당시 심천 롱강 绿色골프장이었는데 같이 동반한 한국분이 파3에서 170야드의 공을 쳤는데 정말 환상적으로 날아 가는 것을 보고, 첫 라운딩에서 바로 골프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연습장에서 3개월간 매일 집중적으로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필드를 갔는데, “지인들이 필드 몇 번째냐 해서, 두 번째라고 솔직히 말했더니, 나머지 세 사람이 핸디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 때는 ‘핸디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골프의 지식이 전혀 없었다”라며 박용남 회장은 골프 초기의 추억을 재미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들은 개당 50원에 10개씩 핸디를 주더라. 그래서 1500원을 가지고 골프를 시작했는데, 3개월간 연습을 열심히 한 결과인지 90타 이상을 쳤다. 반면 동반자 3명은 다 100타대를 쳐서, 그 날 골프 첫 내기로 몇 천원을 따자 동반자들이 사기골프라며 짧은 시간에 배운 골프 실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박용남 회장은 골프에 자신감이 붙었고 한동안 골프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골프를 권하며 같이 어울렸었는데, 그 중 이조화라는 친구가 가장 먼저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대회에 참석을 하고 와서, 광동에도 이런 골프회가 세워지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조선 화교인 이조화는 신분상 본인이 설립하기는 적합하지 않으니 박용남 회장이 할 것을 건의해서 2001년 박용남 회장이 초대 회장을 맡아 이조화, 김성걸, 김수, 주호산, 옥경진, 최청림, 임호철, 김철용, 장철호 10명이 정식으로 ‘형제골프회’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이게 바로 광동성 최초 조선민족 골프모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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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도에서 개최된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대회에 광동성을 대표하여 회원중 일부가 참석하였으며, 그후로 전국대회에 매년 참가하였다. 

해를 거듭할 수록 형제골프회는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 외에도 조선민족 기업인들이 모이기 시작해 광동에도 우리 민족 단체를 만들자는 마음들이 모여졌다. 결국 2004년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가 결성되고, 제1회 민속축제가 개최되며 광동의 조선민족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하나골프회 모태는 형제골프회로 제3대를 맞이할 때, 이름을 ‘하나골프회’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광동조선민족골프회로 이어오고 있다. 정리하자면 하나골프회는  제1대 박용남 회장, 제2대 전효동 회장(2006년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대회 혜주 개최), 제3대 강문화 회장, 제4대 이철호 회장, 제5대 이영춘 회장, 제6대 정용택 회장, 현재 제7대 김관걸 회장이 맡고 있다. 


이처럼 박용남 회장은 골프라는 운동 하나로 골프회 초대 회장에서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결성까지 조선민족 사회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박용남 회장은 본인의 기여도는 크게 생각하지 않으며 당시에는 “우리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서러움을 받지 않도록 뭉쳐야 산다”라는 생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박용남 회장은 2012년부터 싱글을 자랑하는 골프실력을 뒤로 하고 골프채를 잠시 내려 놓았다. 이유는 시계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일과 골프를 병행하기에는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과감하게 골프를 멈추고 사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운동을 안하니 자연스럽게 조선민족 사회와는 한동안 떨어졌다. 


바이어가 30여개 나라에 있어 출장도 많고, 한국에 디자인실이 있다보니 한 달에 한 번은 한국에 있어야 했다. 이처럼 골프할 환경도 안되었지만 골프보다 사업 성장에 재미를 더 붙였다. 그 덕분에 회사는 고속 성장하여 중국 시계업계에서는 제법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골프를 한 동안 쉬었지만 후회는 없으며 잘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에 골프를 다시 시작하였다. 사업도 자리를 잡고, 코로나 여파로 출장이며 바이어 왕래가 없다 보니 골프 생각이 났던 것이다. 골프채를 막 잡았을 때는 100대를 치다가 지금은 80대를 치고 있다. 그리고 한 동안 외부활동을 안하다 오랜만에 조선민족 지인들과 골프를 치면서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니옛정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가 작년에 다시 골프채를 잡으면서 12살 아들도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이 골프에 꽤 흥미를 가지고 향후 프로골퍼를 꿈꾸기에, 실력있는 한국인 골프 전문  교수한테서 레슨을 받고 있다. 

 

박용남 회장은 요즘 하루 건너 골프를 친다. 특히 주말 토요일, 일요일은 무조건 아내와 아들과 함께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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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2일은 골프를 시작해서 21년만에 사허골프장(沙河高尔夫球场) A6코스, 165야드로 첫 홀인원을 했다. 그날도 아내와 아들이 함께 골프를 치는데 아들이 “爸爸, 进了!进了!” 소리를 지르길래 직접 가서 보니 믿기지 않게 홀인원이 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아들을 가르치는 교수님 말씀이 “박회장은 특별한 홀인원을 했네요. 타이거우즈도 가족과 함께 홀인원을 못했습니다.”라며 가족 동반 홀인원은 더욱 축복 받는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사업에도 성공한 그이지만 가족을 중시하는 박용남 회장은 진정한 성공사업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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