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7) 채원개 장군의 광저우 활동

[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7) 채원개 장군의 광저우 활동

채원개 장군이 황푸군관학교에서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황푸군교 부임 후 그 다음 해, 국공결렬로 인해 황푸군관학교가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1927년 4월 18일, ‘4.18 사변’으로 불리는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의 반공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황푸군관학교 구락부에서 회의 도중 갑자기 공산당원과 혁명 학생 200여 명이 체포되어 중산함(中山舰)에 억류되거나 난스터우(南石头) 감옥으로 호송되어 구금되고 일부는 사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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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당하는 장면

 

사회주의 계열의 많은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해서 학교를 떠나고 800여 명이나 되던 한인 혁명가들도 광저우를 떠나고 광저우에는 70여 명이 남았습니다. 


황푸군관학교의 한인들은 우한으로 이동하고 황푸군관학교도 일부 학생들을 난징(南京)으로 이동시켜 졸업시키고 황푸군관학교를 대신하는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또 그해 12월 발생한 광저우 코뮌으로 인해 국공합작에 기대를 걸었던 한인의 희망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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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코뮌 후 거리에 나붙은 “공산당을 멸절하자”는 표어

 

채원개는 광저우에 남아 중국군에 입대했습니다. 국민당 군대의 중교(중령)신분으로 광둥수정공서(广东绥靖公署)에서 우전(邮电) 검사를 하는 한편 광저우에 남은 교민들을 결속했습니다.


1928년 1월 채원개는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중산대학 법학원 강당에서 개최한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임시대회에 참여했습니다. 종래에는 동회의 입회자를 청년으로 제한했으나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고 다수의 동지를 결속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유월한국혁명청년회’ 명칭을 ‘유월한인혁명회’로 변경했습니다.


1927년 12월 공산당 폭동으로 인해 줄곧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황푸군관학교는 이듬해 5월부터 교무를 회복했습니다. 1929년 9월 교장의 명령으로 학교명을 ‘국민 혁명군 황푸군관학교’로 개명하고 1930년 9월 제7기생을 졸업시켰습니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중국군대의 참모장이 될 수 없는데, 1930년, 채원개는 재직했던 황푸군관학교 교관에서 중국군 59사(師) 작전참모로 전임하였고, 이듬해 봄 제2사 교도 단장으로 전직했습니다. 1931년 중국군 제1군에 전직하여 참모처장, 교도단장 등 직을 맡고 공산당 토벌 작전에도 참가했습니다. 1932년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된 이후,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광저우에 다시 한인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지사들이 하나 둘 광저우로 피신을 오고, 중산대학에도 약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입학했습니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1934년 6월, 채원개는 한국독립당 광둥 지부(소재지, 廣州市 東山瓦窑後街 41호) 간사였습니다. 채원개는 유월한인광복회 명의로 광저우를 찾아오는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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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스파이치아오(石牌桥) 중산대학

 

유월한인광복회는 중산대학과 협력했는데 중산대학은 한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도록 정원 수를 남겨 두고 비밀경로를 통해 한국독립당이 추천하는 학생들을 수용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중산대학의 한인 학생은 80여 명이었는데 이들의 학비 일부를 ‘유월한인광복회’가 부담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유월한인광복회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 활동을 대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채원개는 중국군 제 19집단군(총사령 香翰屛)에 배속되어 작전 참모로서써 상하이, 난징(南京) 방위전에 참가했습니다. 1938년 봄 제4로군(路軍)으로 복귀하여 고급참모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 정의부 중앙군사위원장을 지낸 이준식(李俊植)이 4로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로 광저우에 부임해 왔습니다. 


1938년 3월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원개는 유월한인광복회 명의로 4월 15일 장사(长沙)에서 거행되는 안창호 추도회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는 안내장을 중국 각 기관에 발송했습니다. 애도를 표시하는 완장의 접수처가 곧 광주시 동산(东山) 쉬구위안로(恤孤院路) 1~13호 채씨댁(蔡宅)이었으니 채원개의 집이 곧 유월한인광복회 연락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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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안병무, 《칠불사의 따오기》, 범우사, 1988년 5월.
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 
조은경, 《1930년대 중국 광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변천》,《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81호 2014년.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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