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2월 11일 새벽,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 기의를 시작할 때입니다. 국민당 장교 차이션시(蔡愼熙)와 타오저우(濤鑄, 1908~1969)를 설득해서 공산당 봉기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이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두 사람을 설득하고 곧 경비단 전체 단원을 선동해서 경비단 한 개 중대가 전향하여 공산당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국민당 경비단 장교 문선재와 김병현입니다. 문선재(文善哉, 1902~?)는 본명이 문종목(文宗穆)이며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출신입니다. 황푸군교 4기 정치과 대대(政治科大隊) 2대 소속이며 연락처는 헤이롱장성(黑龍江省) 통하현(通河縣) 송강의원(松江醫院)이라고 남아 있습니다.
문선재는 평양농업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국으로 와서 지린 사범학교를 수학했습니다. 상하이에서 병인의용대에 가담해 친일파를 처형하는 등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활동을 하다가 황푸군관학교 4기에 입학했습니다. 군교 졸업 후 소련고문단을 수행해서 광저우에 온 동포 김병현(미상)과 제3경비단에 근무하다가 중국공산당 광저우봉기에 참여했습니다.
김병현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홍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이며 광주봉기 실패 후 김병현은 하이루펑(海陸豊)으로 철퇴했다는 짤막한 자료만 남아 있네요.
문선재는 난징 국민당 헌병사령부 정치부에서 당 업무 사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조선공산당 비서장 구연흠(具然欽, 1883~1937)의 비서직을 수행했습니다.
1931년 12월 6일, 상하이 조계지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구연흠이 체포되었습다. 공산당원들이 조계지를 도피처로 삼으니, 일본 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 미국 영사관도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일본 경찰이 조계지에 들어와 공산당원을 검거해도 묵인하고 이들을 체포하는데 협조했습니다.
구연흠이 체포되어 문선재가 중화소비에트대표회의에 참석하려고 상하이 공공 조계지 자푸로(乍浦路)에 있는 한 중국인 집에 숨어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고 징역 2년을 구형받았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문선재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湖南省档案馆校编, 『黄埔军校同学录』, 湖南人民出版社, 1989년 7월
金山:『广州公社』,『广州起义』,中共党史资料出版社,1988년
『文善裁(문선재)에 二年役求刑(이년형구역)』, 『조선일보』, 1932년 1월 30일
『全中国苏维埃大会』,『东亚日报』,1932年 1月 12日.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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