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던 해, 김원봉은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에 다니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원봉과 윤세주(1901~1942) 등 몇몇 소년들은 설음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고의로 일어 수업 시간에 빠지고 학교도 결석합니다. 1911년 4월 29일 일본 천황 생일을 기념하는 날, 김원봉은 친구들과 일본기를 구겨 학교 화장실에 집어넣었습니다.
고향 마을 갑부 전홍표(全鴻杓, 1869~1929)가 사재를 털어 청소년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동화학교를 세웠습니다. 김원봉은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동화학교에 편입했습니다.
동화학교 전홍표 교장은 “우리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하루도 게을리할 수 없다.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또 언제나 비참하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은 김원봉이 3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교훈이 되었습니다.
김원봉은 친구 윤세주와 둘이 체력을 단련한다고 연무단을 만들었습니다. 여름 뙤약볕 아래 강가 모래밭에서 축구하고, 겨울에도 등교하기 전, 등산과 냉수욕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전홍표 교장을 위험인물로 지명하고 동화학교 폐교령을 내리자, 김원봉은 이리저리 다니며 돈 80원을 모아 학교 지원금이라며 교장에게 건넸습니다.
할머니의 배려로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편입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처혔지만, 할머니는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과 사치하며 잘 살았습니다. 거부감이 생긴 김원봉은 서울학교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절로 들어갔습니다. 절에서 뭘 했을까요? 1년 동안 절에 칩거하며 책을 읽었어요. 국가의 출로를 모색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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