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조선 애국자들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독일이 일본을 이길 것이라고 예견하고 한국이 독일과 협력하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예견했습니다. 김원봉도 독일과 같은 강한 군대가 있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시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재학하다가 독일로 유학하러 가서 군사학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1916년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 톈진(天津)으로 와서 독일인이 세운 덕화학당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여름방학에 잠깐 귀국한 사이,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중국에 체류하던 독일인들은 추방당하고 덕화학당은 문을 닫았습니다.
김원봉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김두전(金斗全, 1983~1964), 이명건(1901~?)과 친교를 맺고 해외로 나가 큰일(민족해방운동)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이들에게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조국 산천을 잊지 말라고 김원봉에게는 약산(如山), 이명건에게는 약성(如星), 김두전에게는 약수(如水)라는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1918년 9월, 이들은 난징(南京) 금능대(金陵大)에 입학해서 영어를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1919년 1월 18일,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27개 전승국이 제1차세계대전 후 국제사회의 질서 및 약소국 문제 등을 논의하는 파리 평화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회의에 파견해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한·일 병합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해 주기를 호소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김원봉은 국가의 존립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외국 국가에 호소하여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파리에 가서 일본 대표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일이 누설되어 뜻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김원봉은 중국 동북 지역 서간도에 농지를 사서 젊은이들을 모아 농사를 지으며 군사를 양성하고 싶었습니다. 일찍부터 동북 지역에서 독립운동하는 선배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지린으로 가는 길에 한국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삼일 민족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폭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반감이 벌컥 생겼습니다. 온 국민이 비폭력으로 만세를 외치며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었다고 해서 과연 잃어버린 국권을 뺏앗아 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모부 황상규가 활동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찾아가 상황을 파악해 보니 군대는 짧은 시간에 양성할 수 없네요. 김원봉은 주저 없이 한국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지린 류허현 (柳河縣) 산웬바오(三元堡)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국인 교수로부터 폭탄 제조법을 배우고 김상윤(金相潤, 1897~1927), 한봉근(韓奉根, 1894~1927), 이종암(李鐘岩, 1896~1930),권준(權晙, 1895~1959)과 같은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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