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김원봉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습니다. 거의 말이 없고 잘 웃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주로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는데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하고 톨스토이의 글은 모조리 읽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빼어난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에 멀리서 그를 동경하는 아가씨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원봉에게는 애국심과 동지를 뜨겁게 사랑하는 두가지 성격이 있었습니다.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자기가 만난 사람을 며칠을 두고 모든 정열을 쏟아 설득해서 뜻을 이루었다. 동지들은 그런 김원봉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신뢰감을 얻었고 동지들오 죽음을 두려워 않고 의욕적으로 의열 활동에 투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부하가 궁핍하면 자기가 입은 옷을 저당 잡히는 도량을 발휘하며 단원들 사이에 신뢰를 쌓았습니다.
의열단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자처럼 테러를 숭배했습니다. 마치 정예 용사처럼 자신들의 선혈로써 망국의 치욕을 씻어 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언제나 오늘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날인 것처럼 스포츠형의 양복을 깔끔하게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손질하고 사진찍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반역자들을 처단했습니다.
의열단 창립 이후 약 5년 동안 단원들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암살과 파괴로 과감히 일제를 타격했습니다. 김원봉은 배후에서 조종하며 일제와 투쟁을 지속했으나 실패한 점도 많았지요. 의열단 창립 멤버 13명 중 5명이 투옥되거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했고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에 공산주의가 확산하면서 의열단은 더 심각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간부이던 윤자영(尹子榮, 1894~1938)이 의열단을 이탈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하더니 상하이 삼일교회에서 청년동맹회를 창립했습니다. 청년동맹회는 의열단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연극공연 등 행사를 진행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청년동맹회를 홍보하며 회원을 모집했습니다. 의열단원 100여 명이 이탈하여 청년동맹회에 가입하고 상하이에 의열단원 15~6명이 남았습니다. 그나마 재정 후원도 부족해 7~8명씩 좁은 방에 모여 국수나 만두로 허기를 때우는 상황이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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