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1925년 여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광저우 국민당 지도자 랴오중카이(廖仲恺, 1877~1925), 탄핑산(潭平山, 1886~1956), 등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렵, 광동성과 홍콩이 연합하여 대파업을 거행하는 등 반제국주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는데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반제국주의 정책과 김원봉의 반제국주의 노선이 부합하다고 판단하여 김원봉에게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해 8월, 김원봉은 의열단단원 50~60명을 인솔하여 광주로 왔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원을 약속한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내부 우파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정부로부터 약속된 지원이 무산되었네요. 갑자기 지원을 못 받으니 당장 생활고가 찾아왔습니다. 재무부장인 권준은 재정을 마련하려고 광서 지역에 가서 인삼을 팔았습니다.
이듬해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대회 참석차 광저우를 방문한 여운형(吕运亨, 1886~1947)이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를 만나 협조를 요청함으로써 김원봉의 희망이 성취되었습니다.
1926년 봄, 김원봉은 상하이에서 국민당 원로 천궈푸(陈果夫, 1892~1951)로부터 소개서와 1인당 은화 20원, 배표를 지원받아 광저우로 왔습니다. 한국 자료에는 박효삼, 박건웅 등 의열단원 12명이 입학을 신청했다고 하는데 중국 자료에는 17명이라고 합니다. 당시 군교 정치부 주임이었던 샤오리쯔(卲力子, 1882~1967)가 천궈푸의 소개 편지를 장제스(蒋介石) 교장에게 전달하고, 입교생들은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전원 4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는 학생들을 의열단원으로 입단해서 단원을 확보했습니다. 1926년 9월, 5기에 입교한 오봉환(吴凤焕, 1905~?)은 "어느 휴일 날 한인 동창 80여명과 학교 교정에서 간단한 의열단 선서식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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