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김원봉이 기회주의자라고 지적되는 이유

[중국한인역사] 김원봉이 기회주의자라고 지적되는 이유

1931 레닌주의 정치학교 3기 학생을 모집할 즈음, 일제가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중국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첫 과제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중국의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김원봉은 레닌 정치학교학생 모집을 중단하고 곧바로 국민당 정부에 근무하는 황푸군관학교 동창 캉쩌(康澤, 1904~1967)와 텅제(滕杰, 1905~2004)를 찾아갔습니다. 

 

图片1.png

 

이러한 김원봉 행동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실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국민당 정부와 협력해서 항일 투쟁을 할 좋은 기회이니까요. 동창생 텅제는 국민당의 특무대인 역행사(力行社) 서기입니다. 텅제에게 민족혁명당이 국민당과 협력해서 항일운동을 하고 싶다는 의도를 전달했습니다. 텅제가 김원봉의 의견을 수렴하고 김원봉이 인솔하는 민족혁명당의 취지, 구성원  활동 상황 등을 장제스에게 보고했습니다. 

 

1932 5, 장제스가 김원봉을 초대해 그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김원봉은 중국과 한국의 적인 일본 천왕을 타도하고 한국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 혁명 간부훈련반을 창설해서 단기적으로 혁명 간부를 육성하려고 하는데 국민정부의 재정과 장비, 훈련장소 등 학교설립 지원이 필요하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제스는 한국의 절대 독립 ‘만주국 탈환을 목표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에 간부훈련반 5개 대대가 있는데 조선혁명간부학교는 대외적으로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6대대로 불리고 내부에서는 조선혁명간부학교 또는 의열단 간부학교 불렸습니다.

 

1932년 10 20일, 난징 교외 탕산(湯山)에 선사묘(善祠廟)라는 허물어져 가는 절을 수리하여 기숙사  이론교육을 하는 교실로 삼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학했습니다. 학생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밤 9시에 취침하기까지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이 교장을 맡고 입교생과 교관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30~40원의 월급도 받았습니다.

 

일제가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여 난징 황룡산(黄龙山) 톈닝사(天寧寺)로 이전했습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1933년 4월, 1933년 9월~1934년 4월, 1935년 3~9월, 모두 4년 동안 6개월간의 교육 기간으로 1기 26명, 2기 55명, 3기 44명 등 총 125명 청년 투사를 양성했습니다. 군사교육 외 정치교육으로 삼민주의와 유물사관도 가르쳤습니다. 

 

图片2.png

 

중국 정부가 1기 졸업생 공작금으로 3만 원을 보조하는 등 4년간 40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1기 졸업생은 2~3명이 한 조가 되어 조선이나 만주로 잠입하여 학생을 모집했는데 윤세주는 평톈(奉天)에서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를 포섭했습니다. 또 김원봉은 부산시 동래에 사는 처남 박문희(朴文熺, 1901~?)에게 신간회 회원이나 동래 노동조합원중에서 5명을 포섭하라고 지시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 무렵 민족혁명당 본부는 난징 화루강(花露崗)였습니다. 난징 중화문  북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화루강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웅장한 절이 하나 있는데 입구 화강석에 妙悟律院(묘오율원) 현판이 새겨져 있는 절입니다. 

 

절 문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있는 2 누각이 바로 민족혁명당 활동기지입니다. 조선민족혁명당 사람들은 여기에 머물면서 학습반을 개설하고 회의도 했는데 매년 국치일이 되면 하루 금식을 하며 망국의 비애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