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중국 공산당 팔로군 기지로 가자

[중국한인역사] 중국 공산당 팔로군 기지로 가자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소속이며 독자적인 작전권이 없었습니다. 전단을 살포하거나 벽보를 부착하고 대일심리전을 전개하는 등 후방에서 제한된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1939년 말, 조선의용대 대원이 늘어나 모두 314명이나 되었습니다. 제1구대 일부 대원과귀순 포로 등을 합하여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때 공산당 팔로군은 타이항산구(太行山區)에 들어가 총을 들고 직접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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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시절의 김원봉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조선의용대원들은 국민당이 지시하는 후방 업무에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의용대대원 중 일부는 하루빨리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나 태항산구에 들어가 팔로군과 협력하며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 함께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원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모두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한·중·일 3국의 언어를 잘 구사했습니다. 중국어와 일어 문자에도 익숙하며 대부분 민족 혁명에 대한 확실한 이론과 전술을 갖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생각도 며 사회 관계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렵고 힘든 생활도 잘 견디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조선의용대제2구대 지도위원이었던 최창익(崔昌益, 1895~1960)은 한인 청년들이 중국 항일운동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동북 노선'을 주장했습니다. 동북으로 진입하기 전에 먼저 중공팔로군과 협력하기 위해 공산군과 합류하기를 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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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익은 1939년 3월, 조선의용대를 탈퇴하고 제2구대 18명을 인솔해서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옌안(延安) 공산당 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화북 조선청년연합회 조직하자 다수의 민족주의자가 최창익의 동북 노선에 공감하며 공산당 역으로 자진해서 이동했습니다.

 

1940년 말부터 1941년 5월 사이, 화중과 화남에 흩어져 주둔하던 조선의용대 120여 명이 조심스럽게 뤄양 국민당 구역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기회를 이용해 국민당군사위원회의 동의 없이 4진으로 나뉘어 몰래 공산당 팔로군 역으로 들어갑니다. 조선의용대가 국민당의 승인없이 공산당구역으로 진입한 일은 장제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 대원 40여 명과 충칭에 아 있던 김원봉은 북상하는 의용대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반공 인사들은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역량을 공산당에게 넘겼다고 비판했지요. 공산당 팔로군의 역량은 강해지고 국민당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당은 조선의용대가 경화되어 공산 근거지로 이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용대 친공 성향이 뚜렷해지자 장제스의 태도 달라졌습니다. 팔로군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원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중국군사위원장 잉친(何應欽, 1890~1897)은 조선의용대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더 이상 확대하거나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무마했습니다. 

 

김원봉의 난감한 입장도 가히 짐작됩니다. 모두 자신의 지휘하에 진행된 일이니까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공산당 대표에게 자신도 타이헝산으로 보내 달라고요청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에게 충칭에 남아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옌안행을 거절습니다.

 

한편 김원봉에게는 국민당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김원봉이 충칭을 떠나면 국민당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지원이 중단되어 당장 민족혁명당 가족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장제스는 점차 김원봉을 불신하고, 김구와 임시정부를 정통 독립운동 관으로 인정했습니다.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 광복군 창설을 승낙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국민당 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국민당 군사위원회가 군비를 지출했습니다. 김원봉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선의용대를 취소하고 대한민국 광복군 부총사령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충칭에 남은 소수 대원을 인솔하여 대한민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했습니다. 

 

충칭에서 원봉은 좌우파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김원봉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고 공산주의 계열의 좌파들은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시각으로 김원봉을 평가하시겠습니까?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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