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석은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반일 학생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1925년5월30일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하던 학생과 노동자들이 사살되고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베이징에서도 몇 차례 민중대회가 열렸습니다. 베이징 조선 유학생회도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여 유기석이 기안한 전단 5천 부를 인쇄했습니다.
6월30일,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된 군중대회에서 베이징 조선 유학생회 대표 유기석이 첫 번째로 단상에 올라가 연설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가장 친밀한 형제 국가입니다. 조선 민중은 중국 민중이 처한 운명을 자신의 운명같이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은 중국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연하게 지지하며, 우리 자신의 선혈을 흘려 조중(朝中) 양국 민중의 행복과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랍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동방 피압박민족 공동의 적입니다. 우리 피압박민족이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하면 우리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유기석의 연설은 우뢰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북경의 여러 신문에 관련 내용이 실리고 천요우린(陳友仁,1875~1944)이 발간하는『民報畵刊』에는 사진도 실렸습니다. 한국의『조선일보』도 다음과 같은 유기석의 북경 활동을 보도했습니다.
지난달 삼십일 북경 천안문에서 열린 국민대회 때에 오백여 단체 십여만 명의 어마마한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에는 조선, 인도, 대만, 터어키, 일본 등의 동양 각국 사람들과 독일 사람까지도 참가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중에서 외국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단한 사람은 유기석(劉基石)이라는 동포였다. 류 군은 현재 조양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이날 제일 먼저 등단하여서 침통한 사기로 장시간의 연설을 시험하였으며 연설이 끝나매 단하에 모여 섰던 십만 군중은 비상히 흥분하여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제국주의 타도』, (○○○○타도, ○○제국주의)를 높이 불러 많은 중국인에게 흥분을 주었고 그다음으로는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대만인, 터어키인 등의 대표가 차제로 일장 연설을 시험하였더라.
이때부터 유기석은 공개적인 반일 학생이 되었습니다. 유기석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 사령관의 주의를 끌었고 반역적인 생각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조선이 해방되지 않으면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때 20세였다.
베이징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활동도 시작했다. 『기독신보』 주간 신문에 조양대학 유기석의 명의로 「黑子와 基督」이라는 논설을 연재해서 겸애설을 주장한 묵자와 예수를 비교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점점 희박했기 때문에 유기석의 반일 결심은 더욱 강해졌고 행동도 점점 더 극단적으로 되어 마침내는 일본과 직접 투쟁하는 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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