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9)리밍(黎明)고등중학교 교사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9)리밍(黎明)고등중학교 교사

푸젠 신 농촌건설 운동이 실패하고 유기석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일제 밀정들이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유기석은 비밀히 조직된 무정부주의 불멸 구락부에 가맹했습니다. 활동비는 중국 측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고 구락부 동지 중 최동길은 다니던 복단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집에서 송금해 오는 학자금을 이들의 의식비로 제공했습니다. 

 

취안저우의 리밍(黎明) 고등중학교가 떠올랐습니다. 이전에 신 농촌운동에 종사했던 친구들이 방침을 바꾸어 취안저우 시내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공산당이 푸젠성 서쪽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홍군을 훈련하는데 힌트를 얻은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만의 민중 무장 활동 근거지를 취안저우에 마련하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지가 설립되자 스촨ˑ 후난ˑ광둥 등지에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이 취안저우를 무릉도원쯤으로 보고 잇달아 몰려왔습니다.

 

리밍 학교는 국민당 고위급 인사를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해서 토비들도 감히 학교 운영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방위군이 주둔하여 취안저우 정세가 다소 조용해졌습니다. 리밍 고등중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아나키스트이며 수준이 비교적 높았습니다. 한국에서 농업을 전공한 원예전문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이 생물 교사로 재직하고 허열추(許烈秋)도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1701743055557.png

 

 

취안저우까지 가려면 여비가 적어도20원은 있어야 하는데 유기석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가난하여 빌릴 데도 없고, 군중(群衆)서점 사장을 찾아가 책을 한 권 써주기로 하고 원고료40위안을 선불로 받아 여비를 해결했습니다.  

 

유기석이 리명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리 교사가 결원이어서 지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중국 큰 도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고, 영어 지리책과 일본 책 『세계 지리 대계』를 참고해서 외국 지리를 가르쳤는데 수업이 재미있다고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체육 교사도 결원이라 지리와 체육 교사를 겸임했습니다. 매일 아침 체조 시간이 있는데 학생들이 늦잠을 자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맨발이나 나막신을 신고 나왔기 때문에 달리기나 비교적 어려운 체조는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체육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과목이라고 여기며 교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임 체육 교사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더니 학생들이 쫓아내려고 해서 전임 체육 교사가 사직해서 결원되었다고 합니다.

 

유기석은 체육을 좋아하고 학생 시절 축구선수였습니다. 학교 측과 상의하여 아침 체조를 필수 과목으로 정하고 체조 시간에 출석을 불렀습니다. 아침 체조15분 전, 학생 숙소 앞에서 피리를 불어 운동장에 나올 준비도 시켰는데 학생들과 친근감이 형성되어 인기가 좋았습니다.

 

교장이 병이 나서 유기석이 교장 직무 대리도 맡았습니다. 1930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1931년 두어 달 교장직을 수행했는데 학교 측 이사와 교사 사이에 분규가 생겨 유기석은 교장 대리직무를 내어놓고 리밍 고등중학교를 떠났습니다. 

 

图片3.png


图片6.png
사진, 류기석의 중국 거주지를 파악한 일제 요주의인물 카드,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