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3) 카이펑에서 신문기자 하다가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3) 카이펑에서 신문기자 하다가

1932년 중국인 잉치롼(應起鸞)과 결혼하고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에 정착했습니다. 유기석이 톈진 일본 영사관 폭사사건을 주도할 때, 잉치롼이 베이징에 있는 폭탄을 톈진으로 옮겨 유기석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스물 다섯의 잉치롼은 최신 유행하는 가죽외투를 입은 신식 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에 폭탄 두 개를 담아 들고 태연자약하게 플렛폼을 빠져 나왔습니다.

 

1928년 가을 어느 날, 잉치란은 난창(南昌)에서 유기석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겼다”다고 합니다. 장시성(江西省) 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학생시위를 주도하다가 공청단(共靑團)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고 난창을 떠났는데,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4년간 연애했습니다. 잉치롼의 부친이 나라잃은 이국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마침내 부친의 승낙을 얻어 류수인과 결혼하고, 결혼 후 남편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해 아이 넷을 홀로 키우며 가정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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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이화여대 홍석표 교수와 류수인의 딸 류앵과 면담 장면, 출처 이대학보

 

1933년 가을, 유수인은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을 찾다가 『河南日報』기자로 취업했습니다. 신문사 기자 생활은 1929년 봄, 난징 『東南日報』에서 시작해서 『天津商報』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河南日報』는 매일 보통 신문 크기의 6면을 발행했는데 발행 부수가 14,000부 정도로 황허 유역에서는 첫 손가락을 꼽는 지방관청 신문이었으며 직원만도 100여명이었습니다.

 

유기석은 『河南日報』의 사설을 썼습니다. 주로 국제적인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는데 사장은 한번 훑어 보고 논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문맥상 틀린 부분이 발견되면 몇 글자 고쳐줄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신문사 월급만으로는 가족부양비가 부족해 교원 생활도 겸하여 19377월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약 5년간 허난에 머물렀습니다.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김과 안 두 성씨가 연명하여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유기석에게 전보를 보낸 김 씨와 안 씨는 누구일까요? 김씨는 김구이고 안씨는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으로 추정됩니다. 유기석은 무정부주의 사상에 편향해서 민족주의 지도자 김구나 안공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전보에는 공산주의도 좋고 아나키즘도 좋지만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뒤엎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얻은 후에 가능한 것이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항일 혁명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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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점령하겠다며 병사력을 증강해 석 달 만에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했습니다. 상하이에 살던 한인들은 대부분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래도 상하이에 일본인과 사업을 하거나 친일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방치할 수 만는 없었습니다.

 

안공근은 그의 조카 안후생(安厚生, 1918~) 등 애국 청년을 모아 암살을 목적으로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했습니다.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의 참모이며 연락처는 新天祥里 20호 곧 안공근의 집입니다.

 

유기석은 이들과 협력을 결심하고 전보를 받은 후 곧바로 9월 초 카이펑을 떠나 상하이로 왔습니다. 난징에 도착한 다음 날,  일본비행기96대가 편대를 이루어 고도의 상공을 날면서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하며 상하이를 점령하기 위해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민족 독립운동 계열은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으로 분열되어 혁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기석은 중재를 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선택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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