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오상선 :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경성지부 핵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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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오상선 :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경성지부 핵심인물

오상선(吳尙善, 1900~?)은 경성 출신이며 황푸군관학교 2총대 보병과 1중대 소속입니다. 1933년 10월 16일, 경성 서대문경찰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발송한 공문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사건 발각에 관한 건’에 의하면 오상선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경성지부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여러 차례 일제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당원들을 사상범이라고 체포해서 당 조직 자체 유지가 어렵게 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소련의 공산국제는 조선공산당 조직은 지식인이 아닌 노동대중 속으로 들어가 결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농민대중을 의식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공장, 농촌, 어촌으로 침투하여 노농대중을 토대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안광천(安光泉, 1897~?)이 일제를 피해 도피차 베이징에 왔습니다. 그때 김원봉은 중국 국공합작의 파탄을 겪고 심란할 때였습니다. 기대했던 중국의 국공합작은 깨어지고 중국 공산당 난창봉기에도 참여했으나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힘에 계속 밀렸습니다. 의열단도 거의 해체되다시피 해서 중국에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할때 입니다.


김원봉은 자신의 입지를 재정비하면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활발하게 주도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대중운동과 연합하기로 의열단의 노선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 무렵, 원산에서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하고 일제와 자본가들의 온갖 탄압 속에서도 4개월이나 버팀으로써 단결력과 강인함을 과시했습니다. 그해 11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와 동맹휴학도 진행했습니다.


안광찬과 김원봉은 협력해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30년 4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산하에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해 조선 공산주의 대중운동을 이끌 간부를 육성했습니다.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 경력을 가진 자들이 레닌주의 정치학교에 입교했고 6개월 교육 기간으로 ‘공산주의 이론, ‘조직 및 투쟁’, ‘조선 혁명사’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1930년 4월~9월, 1930년 10월~1931년 2월까지 레닌주의 정치학교 2기를 운영하여 21명을 배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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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레닌주의 정치학교 졸업생 공작원 20여 명이 한국의 주요 도시와 농촌으로 잠입해서 각지에 공작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조직이 완성되면 중앙부에서 간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동시에 중앙부 간부를 국제 공산에 파견해서 조선공산당을 완성하려는 계획이었지요.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은 하부조직으로 베이징, 만주, 조선에 지부를 설립했다. 조선지부는 간사국 산하에 목포, 부산, 강릉, 대구, 경성, 평양, 신의주, 원산 지방조직을 설치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사건은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제공산당 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 베이징 레닌학교 등 7개 기관이 연합하여 진행하던 조직적인 비밀 활동이라고 드러났습니다.


1933년 9월, 동대문 밖에 있던 종방제사회사(鐘紡製絲會社) 조사과(造絲科) 직공 500여 명이 동맹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서대문경찰서에서 남녀 직공 다수를 검거하여 조사하다가 베이징의 레닌주의 정치학교 졸업생 10여 명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경성, 평양, 강릉, 부산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술했습니다.


1933년 10월, 일제의 정보망에 포착된 레닌주의 정치학교 졸업생은 정인갑(鄭麟甲), 김진일(金鎭一), 정동원(鄭東源), 이강명(李康明), 이윤경(李允慶), 어윤봉(魚允鳳), 오필득(吳必得), 심인택(沈仁澤) 등 9명이었는데, 취조 결과, 요원들은 인테리, 학생, 노동자, 농민 등 신분으로 위장하여 활동했다고 합니다. 운동자금도 해외 지도부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임금과 학자금 등으로 충당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1933년 9월 25일부터 1934년 3월까지 경찰은 질풍 같은 비밀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대문경찰서가 검거를 개시해 경기도 경찰부로 이관하고 경기도 경찰부가 본부가 되어 시내 다섯 개 경찰서의 인원을 동원해서 6개월 동안 경기, 경남, 경북, 평남, 강원, 충남, 충북, 전북 등 8개 도에서 400명이나 검거했습니다.


1935년 8월 24일 조선중앙일보 호외에 의하면 오상선은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조선지부 산하 경성지부의 핵심 간부였습니다. 경성지국의 간부들은 공장노동자를 포섭하기 위해 스스로 공장에 취직해서 옆 동료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공산청년회 또는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노력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습니다.


일본경찰은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일본 총국에서 활동하던 이재유(李載裕,1903~1944)와 식민지 조선의 최고학부인 경성 제국대학 미야게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1899~1982)도 교수신분으로 조선 민족운동에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한국의 각 산업분야마다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사건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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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主義政治學校 卒業生 朝鮮에 潛入赤化工作」,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호외,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

 

 [참고문헌 및 자료]

湖南省档案馆校编, 『黄埔军校同学录』, 湖南人民出版社,1989년 7월 325쪽.
「레닌 主義政治學校 卒業生 朝鮮에 潛入赤化工作」,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호외,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관한 件」,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 사상에 관한 정보 6』, [DB/OL]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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