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Conton China 보내는 이 : 清国广东省城小北门内十八洞二十七号 받는 이 : 米国桑港大韩人总国民会馆僉兄閣下 위 사진은 100여년 전 김복(범재 김규흥)이 광저우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하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봉투입니다.미국에 계시는 범재 김규흥의 손자께서 봉투 사진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비록 미국에 소재하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글이나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사료인지라 전문을 올립니다.편지글은 김규흥께서 쓰신 한문 문장을 손자되시는 분께서 읽기 쉽게 풀어 주셨습니다. ...
벌써10여년전,2012년7월이었습니다. 옥천신문사사장님과연구가몇명이 광복절67주년특집으로옥천의독립운동가‘범재김규흥’을준비하면서자료를찾으러광저우에왔습니다. 급하게 마련된 점심시간에 제가 동석을 했습니다.그들의 대화는 김규흥께서 추노(邹鲁),호한민(胡汉民),진형명(陈炯明),오한지(吴汉持)등과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그 때 저는 손중산의 혁명동지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때여서 추노, 호한민,진형명,오한지는 알지만 우리나라의 범재 김규흥은 첨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방문단이남긴자료중에자료중에 김규흥이미국...
유기석 지사는“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중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국가가 없는 망국민은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한 유기석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국제법이나 당국의 보호라는 것은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오직 망국 민중이 각성해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재중국 독립운동은 민족주의파,공산주의파,무정부주의파로 ...
1945년 봄, 일본 괴뢰국 왕징웨이(汪精卫, 1883~1944)정부가 운영하는 국립중앙대학에 반일 사상이 투철한 조선 학생 10여 명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날마다 패배하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도 흔들려 추락할 때입니다. 1944년 중앙대학에서 매국노 교장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맹 휴학 운동을 일으켰는데 당국이 학생운동 간부를 체포했습니다. 그중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서 탈출한 박철원(朴哲遠)과 중국 친구들로부터 일본군 중국 파견군 사령부 연락부(특무기관)에 통역관으로 일하는 조일문(趙一文...
1938년부터 일제는 '육군 특별지원병 명령'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은 징용해서 중국 전쟁터에 종군시켰습니다. 일제는 조선 관적 병사들이 총부리를 돌릴까 봐 별도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일본관적 병사 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중국 전쟁터에 일본군에 소속된 수만 명 조선관적 병사가 총알받이로 등장합니다. 유기석 지사는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족 병사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소속된 부대에서 “의를 일으켜, 기의(起義)”즉 한인이 일본 군에 강제 종군하는 불의를 의식하고 탈출하...
유기석은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으며 교육자입니다. 1938년 말,일제는 난징까지 점령해서 지하공작도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기석은 공작조 작업과 활동을 마무리하고 상하이를 떠났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임시정부 일행을 따라갈 수도 없고 상하이에 발붙일 곳도 없는지라 창장(長江)에서 배타고 장수(江苏) 북쪽 지방 하이먼현(海門縣) 링춘(靈旬)항구에 내려 국민당 계통의 유격대가 활동하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일제 기밀문서에 유기석이 상하이를 떠나 몰래 홍콩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한 걸로...
1937년 12월,한인들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난징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일본군은 난징도 점령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이 있기 직전, 임시정부는 동포를 난징으로 불러들여 물가가 가장 저렴한 창사(長沙)를 향해 떠났습니다. 1938년 봄부터,상하이 공공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는 실제적으로 일본 특수공작원 기관이 지배했습니다.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홍커우(虹口)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1,000명은 대부분 조선거류민회에 소속되어 아편과 마약류를 판매하거나 위안부를 운영하는 친일 분자였습니다. 유기석의...
1932년 중국인 잉치롼(應起鸞)과 결혼하고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에 정착했습니다. 유기석이 톈진 일본 영사관 폭사사건을 주도할 때, 잉치롼이 베이징에 있는 폭탄을 톈진으로 옮겨 유기석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스물 다섯의 잉치롼은 최신 유행하는 가죽외투를 입은 신식 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에 폭탄 두 개를 담아 들고 태연자약하게 플렛폼을 빠져 나왔습니다. 1928년 가을 어느 날, 잉치란은 난창(南昌)에서 유기석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