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총영사 암살을 시도하거나 일본병영을 폭파하고 백주에 은행을 터는 등, 이런 일들은 일제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거사였습니다.그래서 일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테러, 살인,강도 방화를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만 유기석은 이와 같은 테러활동이나 사유재산 철폐 같은 직접 행동 방법으로 일제 통치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입니다. 취안저우 여명중학교에서 형을 만난 유기문도 형과 함께 직접 행동에 참여했습니다. 유기문은 1930...
취안저우여명학교 재직시절,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 유기문과 상봉했습니다. 유기문은 형을 따라 아나키스트의 길로 들어섭니다. 1931년, 유기석은 중국인 동지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과동시에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를 시도합니다.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은 천리방이라는 동지가 시도하고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는 동생 유기문이 시도합니다. 천리방이 쿠와시마 암살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천리방은 의열단원 이용준(1907~1946)지사의 가명입니다. 이용...
1920년 가을, 유기석이 집을 떠날 때, 동생 유기문은 11살이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꼭 형을 따라가겠다고 쫒아와서 유기석이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대성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동생은 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유기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며칠이 안 되어 해고 되었습니다. 형이 반역적인 조선인, 반일 인사라는 이유였습니다. 유기문의 일거수 일투족도 감시를 당하는지라 조선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출국 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 형 때문...
푸젠 신 농촌건설 운동이 실패하고 유기석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일제 밀정들이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또 어디로 가야 하나? 유기석은 비밀히 조직된 무정부주의 불멸 구락부에 가맹했습니다.활동비는 중국 측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고 구락부 동지 중 최동길은 다니던 복단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집에서 송금해 오는 학자금을 이들의 의식비로 제공했습니다. 취안저우의 리밍(黎明) 고등중학교가 떠올랐습니다.이전에 신 농촌운동에 종사했던 친구들이...
유기석이푸젠의 신 농촌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은 단순히 사상적 출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상과 현실은 엇갈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번뇌와 환상이 뒤섞여 밤낮으로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좌로 향하면 거기도 불평등하고,우로 향하면 거기는 금전만능이어서 돈 없는 가난뱅이는 어디를 가도 여전히 학대받는 사회였습니다. 상하이에서 몇몇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구동성으로“민남(閔南)으로 가서 신 농촌을 건설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소련의 무산계급 독재정치를 반대하며 무정부 공산사...
사진, 1927년, 『狂人日記』 한국어 번역문을 발표할 무렵의 유기석(유수인),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석방된 유기석은 일제의 눈에 띄지 않게 도산과 따로 움직이며 러시아 우수리강(烏蘇里)강 동쪽 니콜리스크로 이사한 본가를 찾아갔습니다.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건립된 러시아에는 민족 차별이 없이 각 민족의 민중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모스크바 동방 노동대학에 입학할 준비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습니다.조선인 혹은 중국인이 협동조합 ...
항공학교 입학을 준비하면서 타이위안(太原)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기석은 도산 안창호로부터 3개월 휴가를 낼 수 있다면 함께 동북으로 여행 가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동북 지린에 조선 교민이 약 4~5,000명 살고 있었는데 당시 산만한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을 단결하려고 도산이 고안한 여행이었습니다. 아직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지 않아서, 1927년 설을 전후해서 유기석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동북 지역 지린에 갔습니다.도산의 수행비서는 유기석이었습니다.도산은 긴 두루마기의 마괘자,중국 모자,검은색 솜 신발,...
1925년8월 유기석은 친구 심여추와 파진(巴金,1904~2005)을 찾아갔습니다.바진은 심여추가 소개한 北海沿 東興公寓에서 묶으면서 베이징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숙박객이 많지 않고 정원에는 회화나무 거목이 있는 아파트인데 바진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巴金(바진) "그(심여추)는 조선인이었다.어느 날 밤 그는 동향의 친구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더웠지만 청명한 달밤이었다.우리들은 정원에서 바람을 쐬었다.심(沈)은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고 같이 온 그의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