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한인 독립운동계는30년대초까지만해도통일된기구가없었습니다.1935년7월 5일,김원봉은 난징 중앙대학교에서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미주 대한독립당등5개정당을 통합해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습니다.재중항일운동계에 있어서 규모가 가장 큰 정당입니다. 김원봉이레닌 정치학교를운영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의 몇몇임시정부인사들을 민족혁명당참여를거부했습니다.이들을 제외하고 좌우파 재중한인독립운동가들이 거의 집결하여 민족혁명당 인원은 약500여명이 되었습니다. 민족혁명당 창당 시 서기장은 김원봉,조직부...
1931년레닌주의 정치학교3기 학생을 모집할즈음,일제가 만주를 점령했습니다.중국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첫 과제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을 대적하는 일입니다.중국의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김원봉은 레닌 정치학교학생 모집을중단하고 곧바로 국민당 정부에 근무하는 황푸군관학교 동창 캉쩌(康澤, 1904~1967)와 텅제(滕杰, 1905~2004)를찾아갔습니다. 이러한 김원봉 행동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의견이분분합니다.사실 기회를 잘잡았습니다.국민당 정부와협력해서 항일 투쟁을 할 좋은 기회이니까요.동창생 텅제는 국민당의 특무대인 역...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년 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김원봉이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결정적인 영향은 쑨원의 국공합작이었습니다. 1924년 1월, 김원봉은 국립 광동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 대표대회를 방청했습니다. 강당 2층이 외국인 방청석입니...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1925년 여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광저우 국민당 지도자 랴오중카이(廖仲恺, 1877~1925), 탄핑산(潭平山, 1886~1956), 등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렵, 광동성과 홍콩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김원봉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습니다. 거의 말이 없고 잘 웃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주로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는데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하고 톨스토이의 글은 모조리 읽었습니다...
광저우한국학교는 화남지역 유일의 대한민국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로,광동성 정부와 대한민국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 대한민국에서 초빙한 선생님들께 우리 교육과정과 교과서로 배우고 익히고 있다.올해 2학기에는 초등 21명,중등 18명,총 39명의 학생들이 전편입으로 함께 하게 되어 2학기에 학급이 증설되는 등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는 중국 내 많은 한국학교들이 학생 수 감소를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로 개교 10년째를 ...
광저우한국학교는 화남지역 유일의 대한민국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로,광동성 정부와 대한민국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 대한민국에서 초빙한 선생님들께 우리 교육과정과 교과서로 배우고 익히고 있다.올해2학기에는 초등21명,중등 18명,총 39명의 학생들이 전편입으...
군대는 당장 조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이 조국을 뺏은 일본 강도와 투쟁하겠다고 찾아낸 대안은 폭력이었습니다. 마침 죽마고우 강세우가 밀양에서 삼일만세운동을 하고 중국으로 왔는데 김원봉은 언제까지 공부만 할 수 없으며 직접 행동이라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급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9년 11월 9일, 동지 13명과 황상규의 지도하에 지린 중국인 판(番)씨 집에서 밤새워 토론했습니다. 현재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한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