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색간부단의 임무는 행군 중 마아저둥, 저우은라이, 주더(朱德, 1886~1976) 등 중앙군사위원회 지도자들의 안전을 보위하는 것입니다. 1935년 4월 29일, 저우은라이, 류바이청(刘伯承, 1892~1986) 등 간부들이 김훈에게 5월1일 전까지 진사자오 핑두(金沙皎 平渡)를 점령하여 홍군이 북상을 할 수 있는 근거지를 학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임무를 부여받은 김훈은 곧바로 선발대를 조직해서 국민당부대로 변장했죠. 밤낮 180리길을 도보로 강행군해서 다음 날 새벽 국민당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는 이른 시간에 진사강변에 ...
1932년 7월, 중화소비에트중앙국 서기이자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부주석인 저우은라이가 김훈을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 수립된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로 불렀습니다. 루이진에서 김훈은 삐스티(毕士悌)란 이름으로 중앙군사위원회 노농홍군 1방면 보충사 노전(老战)위원회 참모직에 임명되었습니다. 노전위원회 임무는 중앙소비에트지구 홍군을 모집해서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일입니다. 김훈은 저우언라이를 도와 병사를 훈련시켜 보충단 10개나 조직했습니다. 1934년 1월, 김훈은 중국공산당 전국 소비에트 2차 대표대회에 조...
아무래도 계속 군사활동을 하려면 군사학교에 입교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1921년 5월, 김훈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16기 포병과에 입교했습니다.청산리 전쟁을 치른 그 다음 해입니다. 윈난강무당에서도 김훈은 제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무거운 벽돌을 지고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지를 단련했습니다.산악시간에 벽돌 20장을 담은 배낭을 매고 등산 경기를 하는데 김훈이 매번 일등하여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피눈물 나는 ...
중국 혼성단장 멍푸더(孟富德,?~1950)로부터 중국을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은 북로군정서는 중국측의 곤란한 처지를 이해한 북로군정서는 지린을 떠나막연히 백두산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이범석 장군은 백두산에서 군대를 확장하고 군력을 기른 다음,두만강을 건너 조국한반도의척추산맥낭림산맥을타고남쪽으로내려가서울인왕산이나북악산에서일본군과정당히포문을열고민족적항일전쟁을전개할구상이었습니다. 북로군정서는시다퍼사관연성소를폐쇄하고1920년9월17~18일장정길에올랐습니다.이동하는병력규모는당지에서모집한보병, 연성대사관졸업생, 기초교육을막시작한보병,...
김훈이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을 때, 젊고 훌륭한 교관이 부임했습니다. 신식 군사학교 윈난강무학당을 졸업한 이범석(李範奭,1900~1972)장군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이범석 장군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해 보니 군사지도자 감인 김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범석은 김훈을 조교로 발탁하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병사 135명을 선발했습니다. 이들로 교성대를 조직해 정예군을 양성해 국내로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범석은 먼저 정예군의 정신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정예군...
지난6월 10일 광저우한국학교(교장 김성희)에서는 현재 진행중인 글로컬 미래인재 프로젝트참가자들이 백운구의 광저우 도시계획전시관과 대원수부를 방문하는 1학기 답사를 진행하였다.글로컬 미래인재 프로젝트는 우리 학생들의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자 기획한 교내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와 연계된 활동을 통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자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진행하고 있다.답사에 참여한 11학년 구성연 학생의 답사기를 소개한다. 이번 답사는1학기 용인 상현고 학생들과의 멘토링 발대식,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황푸군관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있어서 펌프처럼 지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 군사 학교였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려는 한인 젊은이 가운데는 의욕과 열정만 앞서 시험준비를 하지 않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채, 돈도 없이 무작정 광저우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입교만 하면 학비와 숙식비가 무료인데다 매월 소정의 월급도 있었으니까요. 형편이 어려운 한인 청년들은 비모집시기에도 광저우로 와서 황푸군교 입학을 시도했습니다. 입교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객지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한인입교생들은 대부분 가...
1929년 6월28일, 상하이를 경유해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에 일본 경찰이 서응호를 수상히 여겨 체포하여 인천 수상경찰서에 구금했습니다. 서응호는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경찰서를 탈출하여 함경도 문평(文坪)으로 와서 일을 했습니다. 석유회사에 근무하기도 하고, 집에서 농사도 지었으나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8월 구직 차 상경했습니다. 경성에서 유월 한국인동지회의 동지 김철호(金哲鎬, 1901~1950)와 윤충식을 만났습니다. 김철호(金哲鎬, 1901~1950)는 1926년 8월, 중산대학 농과대학에 재학 중 의열단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