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황푸군관학교 진보 한인 청년들 - 전의창

한인·동포

[중국한인역사] 황푸군관학교 진보 한인 청년들 - 전의창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조선공산당은 일제 강점기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한 정당입니다.

 

예전에는 일제 강점기 한국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대립하는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학계에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특수성으로 인해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앞서 민족문제 해결을 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많은 분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기 전, 이미 독립운동에 종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민족해방에 대한 열정이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부는, 늦었지만 공산주의도 독립운동의 한 분파에서 출발했다고 인정하고 사회주의자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했습니다.

 

황푸군관학교 4~6기 학생 중 진보 청년들은 주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합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때 조선공산당 성원들은 대부분 학생과 지식인이었습니다. 1928년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에 지식인이 많고 노동자나 농민이 적으며 대중과 연대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산시켰습니다.

 

조선공산당이 직면한 과제는 공장이나 농촌, 학교 등지에서 대중을 모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진보 청년들은 어떻게 조선공산당재건을 위해 활동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천도교 당원 전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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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창(, 1904~?)은 평안북도 선천(宜川) 출신입니다. 황푸군관학교 보병과 1사단 보병 6중대에서 훈련받고 졸업 후 만주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했습니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삼일 만세운동 이후 10년간 일제통치 발전 상황을 보이기 위해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때입니다. 만주의 고려공산당은 이 기회를 이용해 크게 공산주의를 선전할 준비를 했습니다.

 

전의창도 이 일의 한 부분을 수행하기 위해 경의선(義線)을 타고 경성으로 오던 중 기차안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조선박람회 방해자들이 잠입한다는 정보를 접수한 당국은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엄청난 경비를 쓰면서 이들을 잡으려고 애썼습니다. 70일 동안 이만 삼사천 원 돈을 썼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고 긍긍하던 중 전의창을 잡을 때 사동된 경비는 고작 사백삼십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고향에서 활동한 것을 보면 전의창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이 된듯 합니다.

 

전의창은 평안북도 선천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에 몸담고 있으면서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선천은 기독고와 천도교가 발달한데다 조선 제일의 광산왕이라고 불리는 최창학(崔昌)이 경영하는 동면() 금광, 백현() 금광, 삼성(三成) 광업사무소가 있어서 지식층이나 노동자 계층 모두 비교적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럽게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19298월 중순, 경찰이 선천 천도교 교당을 수색하던 중 청년 당원 전의창을 체포했습니다. 전의창은 자신은 상인이며 금궤 9개 시가 80백 원어치를 거래한 밀수꾼이라고 진술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전의창은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펑톈(奉天)에서 경성여관을 운영하며 상업에 종사한던 김의종()이란 동료가 금장사를 하러 한국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데 그가 전의창은 밀수꾼이 아니라 사실 고려공산당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고 진술해서 신상이 밝혀졌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湖南省档案馆校编《黄埔军校同学录》湖南人民出版社, 1989년 7월 97쪽 朝搏开期中(조박개기중)에 入京(입경)한 青年四名(청년사명), 조선일보 1929년 11월 27일

[선천서 활동개기, 청년1명 검거] 중외일보 1929년 9월 30일

[금궤밀수는 虚傳共黨혐의로 被逮] 중외일보 1930년 9월 24일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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