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쥐창샹(旧倉巷) 골목을 탐방하는 목적은 범재 김규흥이 청나라 말기의 주소 쥐창샹 39번지(현 주소 미확인)에 있었던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伍汉持, 1872-1913)는 직접 동북지역에 가서 한국독립운동기지를 세울만한 땅을 물색한 인물입니다. 본인이 직접 동북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혁명동지들에게 보고를 했더니 모두들 좋다고 호응을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연락기관으로 조선신문사를 설립해서 상호연락도 하고 민심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우한츠가 자신의 도강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한 것입니다.
범재는 상하이에 놀고 있는 한글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인쇄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모금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돈을 동포에게 사기당하고 조선신문사 설립은 무산되었습니다.
우한츠는 어떤 사람일까요? 범재 김규흥과 우한츠는 1872년생 동갑입니다. 신문사 설립을 준비하던 1911년 두 분은 39세였습니다.
우한츠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쑨원이 의사가 되어 구국활동을 한다는데 감동을 받고 본인도 포산(佛山)에 있는 영국인 선교사가 개설한 의학당에 입학했습니다. 1899년 27세에 의학당을 졸업하고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광동성 카이핑현(开平县)에 병원을 개원하고 홍콩으로도 다니며 의료활동을 하면서 폭넓게 혁명인들을 사귀었습니다.
1901년 남아프리카 모 선박회사가 선상 의사를 모집하자 우한츠는 혁명활동을 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들여오려면 선상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원했습니다. 1904년까지 선상 의사로 활동을 하다가 1906년 광저우 쥐창샹에 도강병원과 도강의학당을 개원했습니다. 도강의학당에서 공부하던 남학생이 40여명이었는데 대부분 혁명지사들이었습니다.
도강병원을 개원한 그 해, 우한츠가 법정학당(法政學堂)의 감독 샤통허(夏同龢)의 중병을 완치하고 그를 통해 법정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법정학당에서 공부하는 줘루(邹鲁, 1885~1954)와 천중밍(陈炯明, 1878-1933)을 만나고 혁명동지가 됩니다.
신해혁명 성공 후 우한츠는 중화민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위엔스카이(袁世凱, 1859~1916)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1913년 8월 19일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때 우한츠는 31세였습니다.
우한츠 사후 도강병원은 우한츠기념병원으로 세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중산대학부속암전문병원(中山大学附属肿瘤防治医院)이 도강병원의 전신이며 현재 광저우시내 동펑동로(东风东路)에 소재합니다.
가족들이 천진에서 우한츠의 시신을 찾아와 우한츠기념병원 옆에 무덤을 마련하고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1979년 동펑동로 도로 확장을 하려고 담당자들이 우한츠 후손과 협의해서 이전하려고 무덤을 팠는데 무덤은 이미 훼손되고 유골항아리가 없어졌습니다. 부득불 유골없는 무덤을 병원내에 마련하고 2008년 광저우문물 보호기관으로 지정했습니다.
우한츠 사후 97년이 되던 2010년 9월 8일, 광저우 중산대학부속암병원 증축공사장에서 우한츠의 유골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곳인데 전문가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확인한 바, 우한츠의 유골임을 확정하고 현재의 묘원을 마련했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누군가가 우한츠 무덤이 훼손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우한츠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은 100여년 전의 일입니다. 자신의 득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진심으로 한국이 독립하기를 소망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친히 동북지역을 탐사하고, 자신의 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했던 우한츠, 꽃 한 송이라도 들고 찾아가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참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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