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후한민

한인·동포

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후한민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광동군정부의 고관이  김규흥은 자신이 앞에 나서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한 예관 신규식을 앞세워 1912 7 항일결사단체 동제사(同社)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과 중국이 협력해서 조직적인 한국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로 신아동제사(新社)도 조직했습니다. 신아동제사에는 후한민(1886~1936), 송자런(宋敎仁,1882~1913), 천치메이(陳基美,1878~1916) 등 30여명인데 모두 중국 국민당의 주요인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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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민은1968년 대통령장을 추서한 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입니다. “1912년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고, 1921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신규식이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을 만날 때 배석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1926년 러시아에서 데려온 한인 청년 10여명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등의 공적이 있습니다. 


1912년, 쑨원이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후한민은 "2 총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쑨원과 사이가 밀접한 비서장이었습니다. 쑨원이 자신의 이론과 어긋나는 일을 하면 후한민이 명확하게 잘못을 지적했고 쑨원은 그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호한민의 원적은 장시성(江西省) 지안(吉安)이지만 조부가 청나라 관원으로 광저우에 부임하여 광저우에서 출생했습니다. 12세가 되던  부친이 돌아가시고 이어 모친과 형제  명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모두 잃었습니다


후한민은 16세부터 서생이 되어 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01 3년에  번씩 진행되는 향시가 있었는데 생원 1만 명이 응시를 하고 거인(擧人) 80명을 뽑았는데 후한민도 거인에 당선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후한민은 호구지책으로 고관 자녀의 과거시험을 대신 치르고 은 6천냥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그 무렵, 일본에서 청나라 정부와 일본공사의 마찰이 있어서 후한민은 광동유학생 대표로 청조편을 들었는데 입학한지  달만에 퇴학을 당해 귀국을 했습니다.


1904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왕징웨이(汪精, 1883~1944)주즈신(朱信,1885~1920), 랴오종카이(廖仲1877~1925 미리 일본에  있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1905 여름, 랴오종카이와 광저우로 돌아와 휴가를 보내다가 쑨원이 일본에서 동맹회를 창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호한민 부부와 랴오중카이 부부는 곧장 일본으로 가서 주택을 임대해 쑨원을 초대했습니다. 후한민은 쑨원과의  만남에서 쑨원의 사람이 되고 부인과 여동생랴오중카이와 동맹회에 가입했습니다.


호한민은 쑨원의 혁명이론가가 되었습니다. 후한민이  민보의6대 주의(民之六大主) 쑨원의 혁명강령이 되었으며 쑨원과 후한민은 광저우에서삼민주의오권헌법(五权宪法), 건국방략(建方略), 건국대강(建등을 집필했습니다.


쑨원 이론에 대한 문제점은 자신의 이해를 겯들여 설명을 했기 때문에 쑨원 혁명에 대한 후한민 이론은 명확하고 명료했습니다. 190510,일본에 체류하던 혁명파와 보황파(保皇派) 기념회 시간을 빌어  파의 의견을 발표하는데 후한민이 혁명파 대표로 강단에 올라가 3시간동안 거침없는 강연을 했습니다강연이 끝나자  여명 청중이 일어서 끝없는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서 보황파 대표로 나온 캉요우웨이(康有爲)와 양치차오(량계초)의 제자들이 감히 변론 강연을 못했다고 합니다. 


1911 10 10일, 호북성 무창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고, 이어 각 성에서 군정부를 설립했습니다광동성 군정부는 1911년 11 9일에 성립되었습니다. 당시 쑨원은 국외에 있었음으로 후한민이 광동 도독(都督) 취임하고 산하에 군사부재정부민정부재정부사법부외교부교육부교통부를 설치했습니다.   12 21 쑨원이 중국으로 돌아오자 후한민은 중화민국 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광동도독직을 사임하고 난징으로 떠나고 천죵밍이 광동도독 직무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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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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