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봄, 채원개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육군주만주참의부 군무부장직을 사임하고 황푸군관학교로 파견되었습니다.
신해혁명 때부터 숙부 천치메이(陣其美, 1878~1916)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종사하던 천궈푸(陳果夫1892~1951)가 프랑스조계지 내에 새로 개업한 허타이신(河泰新)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비밀히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황푸군관학교는 임시정부에 입교생 추천을 의뢰했고,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 1887~1958)과 박찬익(朴贊翊, 1884-1949)이 한인청년을 황푸군관학교 학생 모집 책임자 천궈푸에게 소개하면 춴궈푸는 소개신과 배삯을 주어 광저우로 보냈습니다.
한인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상황을 보면 3기에 5명, 4기에 24명, 5기에는 200여명이나 입교를 합니다. 게다가 쑨원의 국공합작에 고무된 한국 청년들까지 유입되어 1926년 말 광저우에는 한인 800여 명이 집결했습니다. 이들 중 400명은 만주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에 소속된 독립군 출신이었으며 모두 황푸군관학교 학생대에 입교를 원했습니다.
1926년 겨울, 채원개는 임시정부로부터 안경근(安敬根, 1896~1978)과 황푸군관학교 파견 명령을 받고 참의부 3중대의 ‘함(咸), 장(張)’ 두 학생과 함께 광둥으로 왔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광저우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네요. 환런현(桓仁縣)을 출발하여 푸순(撫順)을 지나 펑톈(奉天)에서 중국 국적(中國 國籍)을 취득하고 신사와 학생으로 변장한 다음, 경봉선(京奉線) 열차 편으로 톈진에 도착하여, 다시 윤선(輪船)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지 최석순(崔錫淳?~1925)의 집에 머물며,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안창호(安昌浩, 1878~1938), 김구(金九, 1876~1949),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이유필(李裕弼, 1885~1945)을 방문해 만주 정세를 보고하고 1주일 정도 머문 다음, 프랑스 윤선을 타고 산터우(汕頭)를 경유해 3일 만에 광저우 바이어탄(白鵝潭)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 황푸군관학교에는 윈난강무학당을 졸업한 양림(楊林, 1898~1936, 김훈)과 최추해(崔秋海, 崔庸建, 1900~1976),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손두환(孫斗煥, 1895~?), 공주선, 김철남(金鐵南, 1895~1952) 등이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기술주임 교관 양림의 안내로 교장대리 겸 교육장 팡징잉(方鼎英, 1888~1976)을 접견하고 5기생(1926 . 11.15.~1927. 8) 제1학생대 부대장직을 맡았습니다.
채원개의 회고에 의하면, 6기생이 입교할 무렵, “외국인 학생 600여 명을 독립 학생대로 별도 3개 중대로 편제했는데 1개 중대 병력은 200명이었다. 제1중대는 한국인, 제2중대는 베트남인, 제3중대는 말레이시아인으로 편성되었다”고 합니다. 채원개가 독립 학생대 학생대장이었고 4기 졸업생 박효삼(朴孝三)이 한인들로 구성된 제1중대 중대장직이었습니다. 채원개는 독립학생대 대장 외에도 편집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참고자료
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주)문학과 지성사, 1994년3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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