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췬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업무를 본 곳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류저우 청사입니다. 1927년, 도로공사가 류저우-충칭 구간에 도로를 건설하고 류저우 종점에 러췬사라는 건물을 세웠습니다. 독일 기술자가 설계하고 상하이 건축회사가 지었는데 당시로서는 전화기가 있는 유일한 고급 호텔이었다고 합니다. 후에 러췬사 지점이 구이린(桂林), 충칭(重慶), 바이서(白色) 등지에도 세워졌습니다.
어떻게 러췬사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이 마련되었을까요? 경위는 이렇습니다. 2000년 9월, 김구 지사의 아들 김신(金信)과 친분이 두터운 전 고려대학교 허세욱 교수께서 류저우를 방문하여 정부 인사를 만났습니다. 허교수는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무를 보았던 곳이 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김신 선생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는데 이 요청이 류저우 정부 인사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류저우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곧바로 문화부 산하에 과제조(課題組)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활동한 역사를 고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허세욱 교수의 집에서 대략적 상황을 이해하고 독립기념관, 백범기념관 등을 참관하며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류저우에서 조직된 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으로 참여한 신순호 여사의 집도 방문했습니다. 한국 방문을 통해 류저우에서 성립된 광복진선청년 공작대의 사진과 대원들의 명단과 주소 등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 고찰단도 류저우를 방문했는데 류저우시 문화부는 전문가와 학자들을 동행시켜 고찰단의 활동을 도왔습니다. 한국 측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활동했고, 여기서 성립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대해 한국 학술계 관심이 많은데 만약 고찰내용이 확실하다면 옛터를 복원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류저우 측에서 이 요구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2002년 2월, 두 번째 한국 고찰단이 류저우에 와서 역사적 현장을 조사했습니다. 류저우시 정부는 상하이, 난징, 충칭 등으로 조사팀을 보내 많은 관련 서적, 사진,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당시 류저우에서 항전에 참전한 노인 좌담회도 개최하여 역사적 사실을 고증 했습니다. 이렇게 5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4년 11월, 뤄췬사에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을 개관했습니다.
1938년 10월, 류저우에 체류하는 한인은 약 120명이었습니다. 러췬사로 입주한 임시정부 요원들은 숙소에 사무실(办事处이라는 간판을 걸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구를 제외하고 이동녕, 조완구, 이시영, 조병조, 차리석, 지청천, 양우조 등 임시정부의 주요 요원들이 다 집결했습니다.
러췬사에 입주한 임시정부 요원들은 충칭에 있는 김구와 한국 동포들과 연락을 취하고, 류저우의 당정군 기관 및 각 항전단체와 연락을 하면서 중국 정부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또 한편 많은 회의를 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여 목전의 항전 형세를 분석하고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전략과 대책을 세웠습니다.
류저우 정부가 러췬사에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 진열관”를 개관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류저우 정부가 우리의 역사를 잘 보존해 주고 있습니다.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진열관”을 개막하던 날, 80세의 중국인 항전 노전사 리멍추(李夢秋)가 참석해서 당시 한인들이 즐겨부르던 ‘타향한야곡(他鄕寒夜曲)’을 기억하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오느라 유랑하길 얼마나 긴 세월이었던가.
조국이 그리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지만 눈 앞이 흐릿하니
어느 때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오.
조용한 밤 차디찬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명월은 서쪽 창에 걸려 있네.
새벽 빛이 찾아오니 홀로 일어나
저 멀리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눈 앞은 여전히 흐리구나.
어느 때나 금수강산 수복할 수 있겠는가
조용한 밤, 차디 찬 바람 스쳐지나 가도
타향으로 내쫒가나 말게나!
……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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