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계속 군사활동을 하려면 군사학교에 입교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1921년 5월, 김훈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 16기 포병과에 입교했습니다. 청산리 전쟁을 치른 그 다음 해입니다.
윈난강무당에서도 김훈은 제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지를 단련했습니다. 산악시간에 벽돌 20장을 담은 배낭을 매고 등산 경기를 하는데 김훈이 매번 일등하여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 1924년 전교 수석으로 윈난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윈난강무당 학교측에서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김훈은 혁명의 도시 광저우로 왔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서는 양림(楊林)이란 이름으로 학생총대 기술조교로 취임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직업교관입니다.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저우은라이(周恩來, 1898~1976)가 김훈을 주목했습니다. 1925년 2월, 동정전쟁에서 김훈은 황포군관학교 3기 학생대 제4대대 학생군 200명을 인솔해서 1~2차 동정전쟁에 참전했는데 전쟁터에서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김훈의 모습은 교관들과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저우은라이가 김훈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2차 동정전쟁 후 김훈은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진하고 저우은라이가 지도하는 혁명청년연합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말, 평양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여자친구 이추악(1901~1936)도 평양에서 일본 군경의 수배를 피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이들은 결혼하고, 이추악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의 동정선전총대에서 선전원으로 일했습니다.
김훈은 예팅독립단 3 연대의 500명을 통솔하는 연대장에 임명 되었습니다. 국공합작기간이지만 중국공산당은 자신들만의 군대가 없었습니다. 혁명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공산당은 1925년 11월 광둥성 가오야오현(高要縣,현재의 자오칭(肇慶)에서 약 2천여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4군독립단을 조직했습니다.
예팅(叶挺, 1896~1946)이 단장을 맡아서 예팅독립단(叶挺獨立團) 이라고도 합니다. 예팅독립단은 명목상으로는 제4군에 예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 광둥지구위원회가 직접 간부를 임명하고 인사이동을 시키는 공산당 군대였습니다. 전체 단원 중 85%가 공산당원이나 공산주의 청년단원인데 한인들도 150여명 있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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