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국민당 반포위 토벌 작전하다가 또 조직과 결별

[중국한인역사] 국민당 반포위 토벌 작전하다가 또 조직과 결별

1933 5, 최정무는 장시성 지안현(吉安縣)에서 국민당 반포위 토벌 작전 전투에 참여했다가 머리를 다치고, 다리에는 총알이 박혔습니다. 장기치료를 받는 동안 중앙 홍군은 국민당당의 5 포위토벌 전쟁을 피해 루이진을 떠났습니다. 이때 최정무는 또 동료들과 헤어져 소속된 조직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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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을 떠나 홀로 아무런 활약을   없게 된 최정무는 당 조직을 찾으려고 막연히 상하이로 왔습니다. 1935 , 상하이 부두에서 날품팔이하면서 오가는 사람 중에서 동지를 찾았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지에서 사냥개에게 물려 인사불성이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상하이 천주교회병원에 입원시켜 주어 석 달간 무료 치료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러시아 돌아가면 행복한 생활을   있는데 이렇게까지 혁명한다고 고생을 사서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동안 혁명에 참여했던 시간을 생각하고, 마오저동주석과 주더총사령관이 베풀어  배려를 떠올리면 하루빨리  조직을 찾아 혁명에 투신해야 한다는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 최정무는 신문에서 팔로군이 우한에서 발표한 항일선전문을 읽었습니다. 팔로군 사무실이 우한(武漢) 있었네요. 12 추운 겨울날 난민들의 틈에 끼여 우한으로 왔습니다. 팔로군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최정무의 말을 믿지 않고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팔로군 부대가 산시(山西) 일대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팔로군 부대에는 자신을 아는 동지가 있을 테니 팔로군 부대를 찾아 산시로 떠났습니다. 후베이성(湖北省) 광수이현(广水县)수현을 지나다가 국민당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최정무는 자신은후베이(湖北) 사람 최경화이며 부두 노동자라고 속여 국민당군 예비군 이등병에 편입했습니다. 1940년 국민당 소속 부대가 광수이현에서 병사훈련을 끝내고 팔로군이 소재하는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최정무가 소속된 군민당군 내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일제가 동북을 점령하고 베이징, 난징, 허베이(河北) 침략하는데도 장제스는 항일보다 공산당 소탕에 전력을 쏟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국민당 병사들은 불만이었습니다. 국민당 병사중에는 동족끼리 싸울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최정무는 국민군 병사 20여 명을 선동해서 캄캄한 밤중에 국민당 군사 경계선을 넘어 팔로군 129사단을 찾아갔습니다. 팔로군 129사단에서 최정무와 동행한 동료들을 모두 팔로군에 편입했지만 본인은 팔로군에 편입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신분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진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무정(武亭) 대면하여 신분을 확인하고 겨우조선의용대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당적을 회복하지 못해 새로 공산당에 입당하여 새로당원 교육을 받았습니다. 1943 2, 조선의용군을 따라 적후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이동해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1945 일본 투항  최정무는   중대를 인솔해서  60필을 몰아 길림성 통화(通化)로 가서 활동했습니다. 후에 랴오닝성(辽宁省민주연맹 조직부 부장직에 있다가 1950 10, 3야전군 9 병단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1952 3 중국으로 돌아와서 내몽고 유제품공장 책임자, 당 지부 서기, 인민대표직을 수행하고 1956 10, 랴오닝성 명예군인 휴양원 부원장을 지냈습니다. 최정무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중국혁명에 몸을 바쳤고 당에 한 점 미안한 일없이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최정무 구술, 박문호 이상각 정리,노홍군 최정무,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 8.
成莉平,民主革命期中国共党的科技思想与科技践研究」, 中南大学 士学位 

刘智文,中国北朝族自治区地方民族和睦的差因初探,黑江民族(季刊), 2001년 2(65)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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