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옌볜(延边) 독립운동 지도자 유찬희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옌볜(延边) 독립운동 지도자 유찬희

독립운동 지사 중에 유기석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어린 나이에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솔직하고 진솔하게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유기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중의 한 갈래를 형성하는 무정부주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지사입니다. 해방 직전에는 주로 일본군에서 복역하는 한국인 학도병 탈출시키는 일을 했는데 장시(江西) 옌산(沿山)에서 학도병이 훔친 일본군의 전략과 방어계획 등이 기록된 문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하려고 충칭을 향해 가다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유기석 지사의 집에는 부친 유찬희와 동생 유기문도 유명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부친 유찬희는 1919년 3월 룽지에서 독립선언 시위를 주도하고 연해주로 넘어가 국민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유기석과 유기문은 부친의 독립 정신을 본받아 아나키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에 가입하여 일제 요인 암살, 기관 파괴, 친일파 처단 등의 의열투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1940년대 광복군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광저우 총영사관의 관할 지역이 화남지역이며 광둥, 광시, 푸젠, 하이난입니다. 유기석 지사는 상하이, 톈진, 허난, 푸젠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푸젠에서 활동한 일이 있어서 이 자리를 빌러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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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옌볜(延边) 독립운동 지도자 유찬희(柳讚熙, 1883~1930)

유찬희지사는 황해도 출신이며 배재학당에서 근대적인 학문을 수학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되는 것을 보면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안도, 황해도와 함경도 등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2년 일본 침략자의 군화발 아래 노예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안투현(安图县) 부아허통(布兒哈通)강변에 정착했습니다. 나라없는망국노(亡國奴)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렵게 장만한 부뚜막의 솥을 누군가가 훔쳐갑니다. 빨아 넣어 옷도 기다란 갈고리로 낚아갔습니다. 한인노점상에는강도들이 들어와 종종 집단구타하고 물건도 뺏어갔습니다. 유찬희는 교민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옌볜에 태광중학(太光中學)을 설립했습니다. 또 한편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옌볜에서도 대규모 독립선언회가 열렸습니다. 유찬희는 간도 지역 항 민족운동 단체인 대한독립 기성총회를 조직해서 3월 13일 룽징(龙井) 독립선언시위를 지휘했습니다.


313일아침, 집회가 예정된 룽징 동청총(東盛涌) 서쪽 끝 들판은 인산인해였습니다. 약 3만명이 운집했는데, 사람들은 명절 때나 입는 깨끗한 흰옷을 입고 흥겨워 춤을 추며 모여들었습니다. 밤 새워 수십리를 걸어온 사람들도 피곤함을 모르고 감격하며 흥겨운 모습입니다.


칠팔십세 노인이 있는가 하면 열서너살의 아이들도 나왔습니다. 국자가 부근 조선족 학교인 창동학교, 광성학교 등 학생과 교사, 한족 학교에 다니는 조선족 학생, 두만강 개산툰 정동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80여명이 밤새 70여리를 걸어 왔습니다.


매일 정오에 울리는 성당종소리를 시작으로 반일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은 알게 된 룽징일본영사관에서 교회종을 울리지 못하게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허룽(和龙)에서 온 소년 임민호가 교회 종각에 올라가 대회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임민호에게 종을 치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의 고무에 흥이 난 소년은 종에 달린 밧줄을 힘껏 당겼습니다.


교회종소리가 울리자 룽징 시가지상점들은 국기를 내걸고 사람들은 손에 국기를 들고 집회장으로 모였습니다. 사회자가 우리조선민족은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민족의 자유를 선언하고 민족의 人道를 선언하노라고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민족 대표들이 한 사람씩 연설을 했습니다. 선언서를 낭독 후 조선 민족 대표 인사 14명이 서명을 했습니다. 유찬희도 김약연(金躍淵,1868~1942)등과 시위발기인중의 한명으로 단상에 섰습니다. 


오전1 1시쯤 집회가 끝나고 시위대가 질서정연하게 시내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시위대 선두가 막 가두로 진입할 때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감정이 격앙된 군중과 경비를 맡은 연길 주둔 군대가 충돌했습니다. 군인들은 실탄으로 군중을 향해 사격하고 맨주먹의 군중들은 전진하자. 후퇴는없다라고 큰소리를 외치며 군인들을 향해 달려 들었습니다.


시위현장에서 14명이 죽고 50~60명이 다쳤습니다. 옌볜의 조선민족운동지도자들은 농촌으로 숨어 들거나 러시아 연해주로 도망을 갔습니다. 유찬희도 가정을 버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고려(崔高麗, 1893~?), 이강(李剛, 1878~1964) 등과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의회를 조직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트에서 약 6개월간 거주하다가 유찬희는 왕칭현(汪淸縣)으로 돌아와 홍범도(洪範圖, 1868~1943), 구춘선(具春先, 1857~1944), 강구우(姜九禹) 등과 국민회를 조직했습니다. 유찬희는 재무부장을 맡아 국민회 재정을 관리했습니다. 유찬희가 러시아에 가서 무기와 군량미 구입하면 농민들이 대오를 지어 연해주로 가서 유찬희가 구입한 무기를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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