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춘(长春), 션양(沈阳), 톈진(天津)을 거쳐 동방에서 제일 큰 도시 상하이에 도착한 유기석은 부친의 친구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선생을 찾아뵈었습니다.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지도를 요청하며 이동휘 아저씨 댁에 머무는 동안 여운형(呂運亨, 1886~1947)선생과 이광수(李光洙, 1982~1950) 아저씨도 만났습니다. 여운홍 선생 집에서 이광수와 함께 산 적이 있는데 이광수는 종종 유기석에게 조선 문학을 가르쳐 주고 또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도소개해주었습니다.
도산은 특별히 유기석을 좋아했습니다.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도산은 귀찮아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도산의 말에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무한한 열정을 띄고 있어 유기석은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산 또한 유기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1920년겨울, 난징 화공중학(華公中學)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동안 유기석은 흥사단 원동 위원부에 입단했습니다. 입단번호 170번, 15세였습니다.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화공중학의 축구대장도 맡았습니다. 상하이에 온 후 유기석은 양복을 입기 시작했는데 양복을 입지 않으면 조계지공원에 놀러 갈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또 루쉰(魯迅, 1881~1936)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후반기부터 루쉰과 관계를 맺고 가깝게 지냈는데, 유기석이 얼마나 루쉰을 좋아했는지 루쉰의 이름이 周樹人인데 자신의 필명도 柳樹人이라고 지었습니다.
1924년6월 화공중학을 졸업한 유기석은 그해 9월, 베이징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옌지도립제2중학교의 동창이자 막역한 친구 심여추(沈茹秋,沈龍海, 1904~1930)를 재회해서 두사람은 의기투합했습니다.
심여추는 도립제2중학교를 다니다가 지린(吉林)으로 와서 지린 중학을 졸업하고 창춘에서『大同日報』기자로 일하면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4년베이징으로 옮겨와 무정부주의 계열신문『國風日報』에 입사하여 부간「學涯」를 편집하여 발행하고, 1925년, 바진(巴金, 1904~2005)등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상하이민중사의『民衆』이라는 간행물을 반월간지로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베이징에서 유기석은 흥사단을 비롯하여 한인교회와 유학생회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925년 1월을 전후해서 한인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베이징 고려유학생회 체육부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ˑ중 학생들과 흑기 연맹을 조직하여 일본의 조선 및 중국 침략을 반대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결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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