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방된 유기석은 일제의 눈에 띄지 않게 도산과 따로 움직이며 러시아 우수리강(烏蘇里)강 동쪽 니콜리스크로 이사한 본가를 찾아갔습니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건립된 러시아에는 민족 차별이 없이 각 민족의 민중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모스크바 동방 노동대학에 입학할 준비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습니다. 조선인 혹은 중국인이 협동조합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계산대에 먼저 갔어도 판매원은 러시아인에게 먼저 물건을 팔고 조선인은 맨 마지막으로 계산했습니다. 정부 기관에서 줄을 서 배급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인은 늘 뒤로 밀렸습니다.
조선 농민이 우수리스크 소비에트 토지국으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허가받은 토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계약은 처음 3년은 수확량의 절반을 관청에 내고, 3년 후 일반 규정대로 조세를 납부한다는 것이었지만 토지국은 단지 2년 경작 후 500여 농가를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위약에 대해 분개하고 불만을 표시한 조선 농민 대표들은 당국에 구류시키고 당국은 수백 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조선 농민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개간지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임대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민족 파별 정책이 여전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은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유기석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없어지고 모스크바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1927년 5월, 유기석은 베이징에서 미국 유학도 준비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자초지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베이징 정부 교육부에서 신청해서 미국 유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여비도 마련해 출국 여권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자,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제도도 희망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북경에서 한 달가량 체류하는 동안 루쉰(魯迅, 1881~1936)의 『狂人日記』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습니다.『狂人日記』는 루쉰이 광인의 입장에서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소설인데 중국의 광인뿐 아니라 조선의 광인도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1927년6월11일, 유기석은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가는 경진선(京津線)기차 안에서 『狂人日記』 번역을 마무리해서 원고를 서울로 보냈습니다. 한글판 『狂人日記』는 8월5일『동광』 제16호에 청원(靑園)이란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노신의 작품은 유기석이 제일 먼저 한국에 소개했습니다.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옌시산(阎锡山, 1883~1960) 부대에서 비행기 조종 기술을 배운 적이 있는지라 옌시산 항공부대에 입대하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오래 머물면 왠지 자신도 부패한 도련님들처럼 아편을 하거나 도박하는 등 나쁜 물이 들어 일생을 망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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