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0) 동생 유기문의 수난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0) 동생 유기문의 수난

1920년 가을, 유기석이 집을 떠날 때, 동생 유기문은 11살이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꼭 형을 따라가겠다고 쫒아와서 유기석이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대성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동생은 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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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며칠이 안 되어 해고 되었습니다. 형이 반역적인 조선인, 반일 인사라는 이유였습니다. 유기문의 일거수 일투족도 감시를 당하는지라 조선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출국 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 형 때문에 취업도 할 수 없으니, 형을 찾아 중국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경찰은 형 본받아 반일 학생이 되지 말라고 하면서 아주 빨리 출국허가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 상하이 황푸강으로 들어왔습니다. 배가 부두에 닿기 전, 발동선 한 대가 강 가운데서 기선과 접촉해서 사다리를 놓고 경찰이 기선으로 올라와, 누가 유기문인가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유기문은 주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잡혀갔습니다. 경찰은 유기문에게 본인은 죄가 없지만 형을 체포해야 하니 형에게 샤먼(廈門) 부두로 마중 나오라고 전보를 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형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문실로 데리고 가서 가죽 채찍으로 때려 10분도 안 되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물을 퍼부어 정신을 차리면 또 고문했습니다. 유기문이 죽어도 형을 팔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자 3일 밤낮을 형구로 고문했습니다. 1주일이 지나고 구치소에서 유기문을 샤면으로 압송하면서 천주 여명 고등중학 유기석, 저는 편안히 상하이에 도착하여 0월 0일 하문에 도착할 예정이니 샤먼 부도로 마중 나오시오, 동생 기문이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샤먼으로 압송될 때, 유기문은 배에서 먹겠다며 바나나를 많이 사고, 피곤해서 일찍 잔다면서 침구를 뱃머리에 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도망칠 궁리를 했습니다. 살짝 이불을 밀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타고 사다리와 발판도 거두어 들었습니다. 배가 출항하기 직전이라 경찰들도 특등실로 간 듯 보이지 않는데 1~2분이 지나니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유기문은 순식간에 용기를 내어 갑판 난간에서 부두로 뛰어내려 부두 옆에 있는 석탄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한참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기선이 부두를 떠나 강 한복판으로 멀어졌을 때, 석탄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형의 주소가 적힌 일기장은 일본 경찰에게 뺏겼지만 프랑스 조계지 貝北路 新天祥 50호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목선 한 대를 발견하고 4원을 주고 프랑스 조계지로 와서 형의 주소지를 찾아갔습니다. 형의 친구를 만나고 곧바로 형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어제 보낸 전보는 일본 측의 음모이니 샤먼으로 가지 마세요, 동생 기문.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9일이 지나고 기문이 여명 중학교로 형을 찾아와 꿈에도 그리던 동생과 상봉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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