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2) 유기문이 일본 선박에 폭탄 투척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2) 유기문이 일본 선박에 폭탄 투척

일본총영사 암살을 시도하거나 일본병영을 폭파하고 백주에 은행을 터는 등, 이런 일들은 일제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거사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테러, 살인, 강도 방화를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만 유기석은 이와 같은 테러활동이나 사유재산 철폐 같은 직접 행동 방법으로 일제 통치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입니다. 취안저우 여명중학교에서 형을 만난 유기문도 형과 함께 직접 행동에 참여했습니다. 유기문은 1930년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다음 해, 1931년 1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백정기 숙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 결성하는데 형 유기석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천리방이 톈진 일본 총영사 쿠와시마에게 폭탄을 던질 때,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유기석은 같은 날 동생 유기문을 만국교 아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 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천리방이 중가공원에서 일본 총영사에게 폭탄을 던지고 폭파 소리가 들리면 유기문이 군수 물품을 실은 남양환에 폭탄을 던져 그 배를 폭파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기석은 여관으로 돌아와 중가에서 울리는 푹발소리는 들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늦어도 1~2분 이내 만국교 아래에서 울릴 폭발음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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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 유기석은 베이징의 약속한 장소에서 천리방과 유기문을 만났습니다. 천리방은 폭탄 소리가 나자, 보초가 도망을 쳤는데 폭탄을 하나 더 준비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기문은 천리방이 던진 폭팔음을 듣고 폭탄을 남양환 선박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런데 폭탄이 갑판 위에 떨어지고 배의 선원이 떨어진 폭탄을 곧바로 물속으로 차 던져 사상자 없이 폭탄이 물속에서 폭발했습니다.

 

유기문은 이 행동을 감행하면서 자신의 안전도 생각해야 하고 또한 적을 소멸해야 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 내가 만일 더 담대하게 선박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졌다면 성공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염려하는 바가 있어 먼 곳에 서서 폭탄을 갑판 위에 던졌고 결과적으로 폭탄을 낭비하고 말았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이 일은 일제에 큰 손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이 투쟁으로 한인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중국인에게는 한인들의 반일 노선을 각인시키고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남화연맹과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하던 유기문은1935년 5월, 엄순봉과 이규호 등과 상하이 거류민 회장 이용노(李容魯)와 친일파 옥빈관 처단 사건에 참가했으나 이후 유기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기석의 전기에도 동생 유기문 말년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독립운동 활동에서 퇴출했는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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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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