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5)국민당 유격대 활동구역에서 학교 설립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5)국민당 유격대 활동구역에서 학교 설립

유기석은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으며 교육자입니다. 1938년 말, 일제는 난징까지 점령해서 지하공작도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기석은 공작조 작업과 활동을 마무리하고 상하이를 떠났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임시정부 일행을 따라갈 수도 없고 상하이에 발붙일 곳도 없는지라 창장(長江)에서 배타고 장수(江苏) 북쪽 지방 하이먼현(海門縣) 링춘(靈旬) 항구에 내려 국민당 계통의 유격대가 활동하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일제 기밀문서에 유기석이 상하이를 떠나 몰래 홍콩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한 걸로 보아 일제는 유기석의 종적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유기석은 장수의 북쪽 국민당의 유격대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한인들과 연락도 못 하고 부인만이 유기석이 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녀들도 아버지가 한인인 것을 몰랐습니다. 1938년 이후, 유기석은 중국 국민당 유격대 정훈처에서 일했는데 심히 부패하여 실망하고 유격대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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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여름, 장수(江蘇) 북쪽 동타이현(東台縣)에서 문화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유기석은 문화사 사회복지부 직원 신분으로 학교를 창립하고 교장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장수 문화사가 교육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3천 원을 제공하고 매월 500원씩 학교 경상비로 지원했습니다. 


관제묘(关帝庙)에 학생 기숙사와 교실을 만들고 동악묘(东岳庙)는 직원숙소로 삼아 기초 건물을 간단히 보수했습니다. 교사 10여 명을 초빙하고 9월 중순, 고등학교 40명, 중학교 1~2학년 80명으로 개학했습니다. 


학교설립 목적은 문무를 겸한 애국 항전 간부 양성입니다. 일반 보통 중학교 과정 외 군사훈련과 체육활동을 중시했습니다. 성실, “돌진, “정의, 용감이라는 교훈을 현수막에 써서 걸었습니다. 학교 담장에는 중국 지도를 크게 그리고, 지도 위에는 우리의 강산을 돌려 달라는 표제를 쓰고 양쪽에는 단결 분투와 항전 필승이라는 여덟 글자도 썼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은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화기애애하게 운영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운영비를 지원하던 문화 인쇄소가 전쟁으로 인해 이전하게 되어 부득불 문화중학은 폐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기석은 이상적인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성 정부에 신청하여 카이윈(關云)에 성립 향촌사범학교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지방관청이 협조해서 지주의 창고를 빌어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두 차례 시험을 거쳐 100명이 넘는 신입생을 모집하고 정식으로 개학도 했습니다. 


약 한 달 이상 수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이 소탕한다며 출동했습니다. 학교 문앞에 화광이 충전하고 연대본부가 불탔습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긴급 소집해서 적이 공격하니 집이 먼 곳에 있는 학생은 잠시 근처의 천척이나 친구 혹은 학우집에 가서 기거하라는 휴학을 선포하고 돌려보냈으나 그 이후 학교는 다시 개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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