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7)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로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7)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로

1945년 봄, 일본 괴뢰국 왕징웨이(汪精, 1883~1944)정부가 운영하는 국립중앙대학에 반일 사상이 투철한 조선 학생 10여 명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날마다 패배하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도 흔들려 추락할 때입니다.


1944년 중앙대학에서 매국노 교장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맹 휴학 운동을 일으켰는데 당국이 학생운동 간부를 체포했습니다. 그중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서 탈출한 박철원(朴哲遠)과 중국 친구들로부터 일본군 중국 파견군 사령부 연락부(특무기관)에 통역관으로 일하는 조일문(趙一文, 1917~2016)이란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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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문은 1980년 건국대학교 제8대 총장이십니다. 조일문은 나카하라 스스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중국 동학들과 일본 동학들도 조일문을 일본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조일문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입조심을 하면서 조선인과도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부(특무기관)에서 상당한 높은 직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조일문은 졸업 후 큰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반일 사업에 참가했습니다.

 

유기석은 혁명동지들을 일본군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상인과 왕진 의사로 변장해서 난징에 잠입했습니다. 이들과 일은 상의하려면 회의해야 하는데 5명 이상 사람이 모일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조일문이 일하는 특무기관 응접실에서 회의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연락부에 가서 나카라하 스스무를 찾고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유기석은 갈색 군복을 입고 망토를 걸치고 긴 가죽신을 신은 괴뢰군 소장으로 가장해서 응접실로 들어갔습니다. 중앙에 자리 잡고 나카하라 스스무가 통역하면서 10~20분 정도 중·일 친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경비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모두 7명이 일본어와 중국어로 대화하고 중요한 일은 조선어를 사용하며 약 1시간 동안 일본군에서 기의를 일으키는 방법, 적의 포위망에서 탈출해 후방으로 오는 길, 일제 점령 지역에서의 연락 장소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난징을 떠날 때, 유기석은 괴뢰군의 고급 군관으로 가장했습니다. 중국 친구 두 명이 호위병 복장을 하고, 완장, 이정표 등을 준비해서 경호해 주었습니다. 기차를 탈 때는 차표조차 끊지 않고 열차에 올랐습니다. 검표원이 차표를 검사할 때, 호위병이 우선 장관을 차에 오른 후 기차표를 사겠다고 하고 기차를 탔습니다.

 

우호(蕪湖)역에 내려서는 최고급 호텔로 갔습니다. 우쭐거리며 기차역을 나와 인력거를 타고 몇 개 모퉁이를 돌아 비밀지역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유기석은 호랑이 가죽옷 덕분에 고급 군관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카라라 스스무는 적군 특무기관(연락부)에서 일주일 동안 몰래 살피다가 아주 주요한 기밀자료를 훔쳤습니다. 칭다오(靑島)에서 샤먼(廈門)까지 연해 지역 일본군 방어지도, 미군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상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 분자 활동 상황 등이었습니다.

 

일제로는 심각한 타격입니다. 전략 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 사업이 모두 노출되었으니까요. 조일문은 상급 비밀자료를 훔친 후 일본 군복과 일본 칼을 착용하고 난징을 떠나 유기석을 찾아왔습니다.

 

일제 특무기관에서는 월요일이 되어서야 조선 관적 인원이 출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조사한바, 기밀문건 한 무더기와 지도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비군에게 뒷조사하라고 명령했을 때 이들은 벌써 안전 지대에 진입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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