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경술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신군기의(新軍起義)는 범재 김규흥에게 있어서는 중국혁명을 깊숙히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905년 청나라 말엽,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많은 지식청년들은 신군에 입대해서 나라의 출로를 찾았습니다. 청정부는 재래식 군인의 형상을 개선하기 위해 신식장비와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고 사병들에게는 다른 군인보다 월급도 많이 주고 세금 혜택도 주면서 신군을 양성했습니다.
쑨원을 위시한 민주혁명파들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들과 협력해서 청나라를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신군들은 지식인들인지라 새로운 사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동맹회 회원들은 신군으로 위장 입대하고, 군대 내에 ‘과학 학습반’ 등 학술모임을 조직해서 비밀히 민주 혁명을 홍보했습니다.
발각이 되어 모임이 금지되면 또 다른 모임을 만들어 신군 사병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신군내 3천여명이 동맹회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안후이성(安徽省)에서 활동하던 예잉뎬(倪映典)은 신분이 노출되어 광저우 신군에 입대해서 전문적으로 혁명활동을 했습니다.
전체 신군의 절반 이상이 동맹회회원이 되었으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예잉뎬, 자오성(赵声, 1881~1911) 등은 1910년 경술년 2월 24일 정월 대보름에 광저우 신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시사화보(時事畵報)>는 민주혁명을 고취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청정부에 눈에 띄지않게 조심히 쿠데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2월 9일, 사소한 문제로 사병과 순경 사이에 시비가 붙어 사병 2명이 체포되고 신군내 동맹회 회원 명단을 입수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대담한 행동을 눈치 챈 청정부는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날씨가 습하다는 이유로 부대에 있는 모든 총과 폭탄을 다른 곳에 옮기고 습한 날씨가 지나가면 다시 원래 위치에 갖다 놓겠다고 가져 갔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예잉뎬 등은 예정일을 앞당겨 1910년 2월 12일(음력 1월 3일)에 신군 300여명을 인솔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창고 담당자를 살해하고 탄환과 무기를 탈취할 예정이었으나 무기고는 텅비었고 무기가 감추어진 사실을 몰랐던 신병들은 청정부에 의해 진압을 당했습니다. 예잉뎬은 피살당하고 조성은 홍콩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경술년신군기의(庚戌新軍起義)’라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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