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한인역사 강정애'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87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범재김규흥의후손이소지하고있는사진중에범재김규흥이광동성후이저우뤄푸산(惠州罗浮山)에서찍은사진이한장있습니다. 편지뒷장에서 산천 경관이 멋지고 깍아지른 듯 험하고 깊은 뤄푸산에는 위당 전병준씨가 수도를 하고 있어서 전병준을 통해“참동계”라는 책을 읽었고 명산을 알게 되었으며 기회가 생겨 풍경을 즐겼다고 사진 뒷장에 썼습니다. 이 글을쓴날은1910년 3월 13일입니다. “...,가운데있는 사람이 취당 전병준이고, 풍요로운 얼굴에 두 손을 무릎위에 가만히 얹어 있는 사람이 환제 왕은장(王恩章)이고, 긴 수염에 맨 가에...
신해혁명이성공하고광동군정부의고관이된김규흥은자신이 앞에 나서지 않고상하이로 망명한 예관신규식을앞세워1912년7월항일결사단체동제사(同济社)를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또한국과 중국이협력해서조직적인한국의항일운동을전개하자는취지로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도 조직했습니다. 신아동제사에는 후한민(1886~1936), 송자런(宋敎仁,1882~1913), 천치메이(陳基美,1878~1916)등30여명인데 모두 중국 국민당의 주요인사들이었습니다. 후한민은1968년 대통령장을 추서한 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입니다.“1912년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
1910년경술년,광저우에서 일어난 신군기의(新軍起義)는범재 김규흥에게있어서는 중국혁명을 깊숙히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기회였습니다.1905년 청나라 말엽,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많은 지식청년들은 신군에 입대해서 나라의 출로를 찾았습니다. 청정부는 재래식 군인의 형상을 개선하기 위해 신식장비와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고 사병들에게는 다른 군인보다 월급도 많이 주고 세금 혜택도 주면서 신군을 양성했습니다. 쑨원을 위시한 민주혁명파들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들과 협력해서 청나라를 타도하려고 했습니다.신군들은 지식인들인지라 새로운 사조에 관...
범재김규흥지사는주즈신(朱執信,1885~1920)이기획한 신군기의(新軍起義)에 참여했습니다.청나라의 신식군인을신군이라고하는데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 사병들로하여금청나라를 타도하려는 구상했습니다.범재김규흥지사도신군기의에참여했습니다. 먼저 신군기의를 기획한 주즈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청나라 말엽,일본 유학을 하는 중국 학생들은 변발을 하고 중국 전통 장포 입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그러나 주즈신은 늘 변발을 늘이고장포를 즐겨 입었지요.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장난삼아 변발을 자르려고 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사...
우리가쥐창샹(旧倉巷) 골목을탐방하는목적은범재김규흥이청나라말기의주소쥐창샹39번지(현주소미확인)에있었던도강병원(图强医院)에조선신문사사무실이있었기때문입니다. 도강병원원장우한츠(伍汉持,1872-1913)는직접동북지역에가서한국독립운동기지를세울만한땅을물색한인물입니다.본인이직접동북탐방을마치고돌아와혁명동지들에게보고를 했더니모두들좋다고호응을했습니다.그래서먼저연락기관으로조선신문사를설립해서상호연락도하고민심을고취하는신문을발간하기로결정했는데우한츠가자신의도강병원에조선신문사사무실을제공한것입니다. 범재는상하이에놀고있는한글인쇄기가있다고해서인쇄기...
아래보도는1923년3월14일,「廣東의三月 一日」이란 제목으로『독립신문』에 게재된 기사인데1923년3월1일 광저우에서 개최된 삼일독립선언4주년 기념행사 상황입니다. 행사의 주최자는김기제(金基濟) 등 9명인데 일본영사관 공문서에 의하면 김기제는 김복(金復)이며 범재 김규흥(金奎興,1872~1936)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廣東의 三月 一日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자동차로 선언서를 선포함. “광둥에체류하던동포김기제, 정인영, 김함산등9명은3월1일독립선언일을기념하기위하여,약1개월부터준비하여기부금130여원을...
1912년 신해혁명 성공 후 김규흥은 광동군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광동성의 군사와 치안을 담당하는 최고 기구广东总绥靖处(广东总经略处)의참의(參議)인데 광동성 도독(현재의 성장직)이 관할하는 최고 군사기관의 고문이 된 것입니다.그 이듬해는 광동성이 아닌 중앙정부의 호군사서(護軍使署)고문으로 승진했습니다. 사진, 황화강공원에 있는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 묘도 입구 김규흥은 용기가 생겨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邓仲元,1866-1922)을 찾아가 조선의 독립운동...
1945년10월25일 충칭의 중앙일보에 실린 줘루(邹鲁)의 기고문입니다.줘루는 중산대학 초대 교장입니다.범재 김규흥과 중국동맹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하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한국 망국민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후 줘루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늘어나서 중산대학 교장 재임기간, 한국학생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돕기 위해 이씨 성을 가진 한인 한 명을 고용하여 한국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도왔다고 합니다. 범재 김규흥이 고정 수입이 없을 때 줘루가 용돈을 ...
2013년1월 한국에 갔다가 옥천 문정리 범재 김규흥 지사의 생가를 찾았습니다.마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의 눈을 푹푹 밟으며 문향헌으로 들어갔네요.그 때는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설정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사진을 찍어 이미지 질이 안 좋은데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김규흥의증조부는세도정치를피해충복옥천군교동으로낙향한 조선시대세가였습니다.당시기와85간, 초가12간을가진거부였으나대원군이경복궁중건할 때시무리한과세를 요구해집안이몰락하던때에범재공은청풍김씨23세손으로1872년6월13일옥천읍문정리문향헌에서출생...
이편지는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문양목회장이 광저우에서 김복(김규흥)이 보낸 편지를 받고 쓴 회신입니다.김복은 광저우에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고 하다가 인쇄기 구입할 돈을 사기당해서 한글 활자가 있는 인쇄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당시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의 상황을 어떠했을까요? 문양목회장이 김복에게 보낸 편지(1911.05.25) 오늘 조국의 상황은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둥지(터전)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뒤집혀진 현상인 바 마치 계란이 눌리어져 깨어지기 직전의 위험한 처지에 놓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