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중국한인역사] 중국공산당으로 전향1927년 4월, ‘청당(淸黨)’정변으로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김훈부부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소련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김훈은 삐스티(毕士悌)로 개명하고 모스크바 중산대에서 1년간 정치이론을 공부하고 모스크바 육군보병학교로 옮겨 다시1년간 군사학을 공부했습니다. 1930년 봄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중앙군사위원회를 향해 무장투쟁을 인솔할 수 있는 조선족 군사간부 한 명을 동만주지역으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김훈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동만주특별위원 겸 군사위원서기로 파견되었습니다. 1926년 5월, 헤이룽장 하얼빈 주허현(珠河縣)에서 성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지역을 동만(東滿), 남만(南滿), 북만(北滿)으로 분류해서 관할했습니다. 둥만은 옌지(延吉), 훈춘(琿春), 허룽(和龍), 왕칭(汪淸), 둔화(敦化), 안투(安圖), 창바이(長白) 등 이며, 남만은 지린(吉林), 단둥(丹東) 일대, 하얼빈(哈爾濱) 이북, 중동 철도노선 일대를 칭하며 쑹화(松花)강 하류의 광범위한 지역을 북만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무렵 소련이“일국일당”원칙을 발표했는데, 한 나라에 한 개 당 원칙을 지키야 함으로 중국에는 중국공산당 활동만 허용되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은 해산해야 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1928년 8월경 중공동만구위원회 산하 10개 지부 조선공산당원이 탈퇴하여 22명만 남았습니다. 1930년 3월 조선공산당 ML파도 조선공산당만주총국 해체를 선언하고 이어 다른 파벌 공산당도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동북지방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거의 해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해산된 조선공산당원들을 중국공산당으로 결집해야 했습니다. 김훈은 옌지현 무산(茂山)촌에 와서 간부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만주당위원회의 결정과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부인 이추악과 지역을 순회하며 활동한 결과, 1930년 8~10월 사이 옌지, 왕칭, 롱징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은 모두 670명인데 그 중 전체 98.5%를 차지하는660명이 한인이었습니다. 그 해10월부터 김훈은 이들을 기반으로 동만특별위원회를 조직했는데1931년 2월까지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산하에 6개 현위원회, 19개 구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김훈은 하얼빈 중공동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 주요임무는 인민대중을 무장시켜 항일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는 무장 대오를 건립하는 일입니다. 지린 판스(盤石)현에 정치군사간부 훈련반을 조직하고 한족과 조선족 군중들을 규합하여 대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좀 무서운 일을 했습니다. 1932년 4월, 반일 농민봉기를 일으켜 친일파 50여명을 숙청하고 일제가 건설한 철도를 파괴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판스에는 이동광((1904~1937), 이홍광(1910~1935)이 친일배를 처벌하는‘개잡이부대’가 있었습니다. 김훈은 ‘개잡이부대’를 토대로 청년들을 흡수하여 반석노농의용군이라는 남만유격대를 설립했습니다. 1932년 5월 7일, 하마하자(河马河子)에서 조선족과 한족 800~900여명과 항일무장 시위를 전개하고 나흘동안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친일배 40여명을 처단했습니다. 김훈은 동만주에서 기존의 돌격대, 권총대, 장총대 등 360여명을 모아 동만항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김훈의 지휘를 받은 옌지현과 허롱현 일대의 농민들은 공산당과 협력하여 친일주구파와 지주들로부터 소작계약서와 고리대금 문서를 빼앗아 소각하고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곳곳에 농민협회가 세워지고 농민자위대도 조직되었습니다. 남만에 항일유격대가 창건되자 한인들은 1930년 5월27일 자신들만의 활동기지 야오수이동(藥水洞)소비에트를 건립했습니다. 대중기반이 좋고 일제 통치기관과 멀리 떨어진 산간마을 샤오왕칭(小汪清), 다황거우(大荒溝)에 소비에트는 조선인 항일유격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근거지내의 인구는 약 2만여명이며 그 중 90%가 조선인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지역에서 토지의 주인이 된 농민들은 유격대원과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도우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소비에트정부에서 반포한 “소학교의무교육법”에 따라 대중들이 자체적으로 학교를 마련하고 시사정치 및 혁명투쟁 사상과 군사지식도 가르쳤습니다. 항일유격근거지에는 착취제도와 억압이 없는 사회, 인민대중이 참다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조성한다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혁명을 실시했습니다. 16세 이상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여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인 권리도 부여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밑이나 움막을 교실로 삼아 공부를 하며 유격대를 도와 곤봉을 쥐고 보초를 서고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근거지내에 농민협회, 반일회, 부녀회 등 대중단체가 적위대, 농민자위대, 청년의용군 등 무장단체들이 항일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깊은 산속에 무기수리소를 마련하여 작탄을 제조하고 부녀들은 의복을 만들어 유격대를 지원했습니다. 김훈은 “추수투쟁”, “춘황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31년 9월, 추수때를 기해 옌지현 농민 800여명은 각 농촌마을을 행진하며 “제국주의 타도”와“소작료 인하”등을 외치며 행진을 했습니다. 지주들로부터 양식을 빌려야 하는 춘궁기에 “양식 탈취” 투쟁을 전개했지요. 1932년 2월, 옌지현 이란구(義蘭區) 일대에서는 농민들이 일본경찰서를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탈취해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윈난 강무학당에서 훈련받은 직업군인아무래도 계속 군사활동을 하려면 군사학교에 입교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1921년 5월, 김훈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 16기 포병과에 입교했습니다. 청산리 전쟁을 치른 그 다음 해입니다. 윈난강무당에서도 김훈은 제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지를 단련했습니다. 산악시간에 벽돌 20장을 담은 배낭을 매고 등산 경기를 하는데 김훈이 매번 일등하여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 1924년 전교 수석으로 윈난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윈난강무당 학교측에서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김훈은 혁명의 도시 광저우로 왔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서는 양림(楊林)이란 이름으로 학생총대 기술조교로 취임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직업교관입니다.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저우은라이(周恩來, 1898~1976)가 김훈을 주목했습니다. 1925년 2월, 동정전쟁에서 김훈은 황포군관학교 3기 학생대 제4대대 학생군 200명을 인솔해서 1~2차 동정전쟁에 참전했는데 전쟁터에서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김훈의 모습은 교관들과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저우은라이가 김훈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2차 동정전쟁 후 김훈은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진하고 저우은라이가 지도하는 혁명청년연합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말, 평양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여자친구 이추악(1901~1936)도 평양에서 일본 군경의 수배를 피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이들은 결혼하고, 이추악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의 동정선전총대에서 선전원으로 일했습니다. 김훈은 예팅독립단 3 연대의 500명을 통솔하는 연대장에 임명 되었습니다. 국공합작기간이지만 중국공산당은 자신들만의 군대가 없었습니다. 혁명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공산당은 1925년 11월 광둥성 가오야오현(高要縣,현재의 자오칭(肇慶)에서 약 2천여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4군독립단을 조직했습니다. 예팅(叶挺, 1896~1946)이 단장을 맡아서 예팅독립단(叶挺獨立團) 이라고도 합니다. 예팅독립단은 명목상으로는 제4군에 예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 광둥지구위원회가 직접 간부를 임명하고 인사이동을 시키는 공산당 군대였습니다. 전체 단원 중 85%가 공산당원이나 공산주의 청년단원인데 한인들도 150여명 있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사상 가장 무더운 한 해? 올해 상반년 고온일 새로운 기록 돌파최근, 중국기상국은 ‘올해 상반년 고온일은 1961년 이래 같은 시기보다 더욱 많다. 7~8월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화북, 화중 중부와 남부, 서남지역 동북부 등 지역에 계단성으로 고온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며 발표하였다. 올해 상반년 중국의 평균 고온일(일 최고기온 ≥35℃)은 4.1일이며 같은 시기(2.2일)보다 1.9일이 많으며 1961년 이래 가장 많은 한 해이다. 같은 시기와 비교했을 때 화북 동부, 화동 북부, 하남 서부, 서남지역 남부 및 신강 남부, 내몽고 서부 등 지역은 5~10일 많으며 일부 지역은 10일 이상이 된다. 올해 상반년 이래 중국은 4차례 지역성 고온과정을 거쳤으며 각 5월 28일부터 6월 5일, 6월 6일~12일, 6월 14일~6월 17일, 6월 21일~30일이다. 광동은 롱저우수(龙舟水)가 잠시 멈추고 부고기압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태풍 마와(玛娃) 하천기류 등 영상으로 5월 하순부터 고온날씨가 지속되었다. 중국기상청은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중국은 올해 처음으로 구역성 고온날씨가 나타났으며 다른 해보다 16일이나 이르며 상해, 운남, 사천, 안휘, 광동 등 15개 성시(省市)에 영향주었다. 하북지역의 고온 극단성이 강해 북경 탕허구(汤河口 41.8℃), 천진 대항(大港 41.8℃) 등 22개 관측소의 수치가 역사 극한치를 초과했으며 124개 국가 관측소에서 40℃이상을 기록하였다.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북경 남교관측소는 연속 3일 동안 기온이 40℃ 이상이였으며 고온시간이 40시간 이상을 지속하였고 6월 22일의 최고기온은 41.1℃에 달하였다. 중국기상청은 7월 상반기 화북동부와 황화이북부(黄淮北部) 등 지역은 여전히 고온날씨가 지속되며 5일~8일에 화북, 황화이에 지속적인 고온날씨가 나타나며 6일~9일은 강남 동부, 화남 동부에 고온날씨가 나타날 것으며 예측하였고 7월, 8월에 중국 화북, 화중 중부와 남부, 서남지역 동북부 등 지역의 기온은 다른 해보다 1~2℃ 높고 계단성 고온날씨가 나타날 것이다고 예측하였다.
-
폭염속에서 줄을 서 800위안 책을 사는 이유가 LV로고가 세겨져 있는 캔버스 가방을 가지기 위해?!여름의 무더위에 상하이 거리에 또 줄을 서는 성황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명품 브랜드가 세 개의 카페와 협업해 진행하는 “일시적 서점”(限时书店)행사이다. 6월 27일 오후, 상하이 영가로, 무강로, 봉현로 세 곳의 "일시적 서점" 앞에 소비자들은 "재미있다"," 사진 찍기 위한 것이다", "책은 비싸지만 캔버스 가방은 가장 싼 아이템이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다" "어이없다"라는 반응도 보였다. 6월 27일 13시경, 영가로 메탈핸즈 카페의 "일시적 서점" 입구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직원이 소비자들에게 권당 290위안의 도시 안내서가 매진되었고, 현장에서 더 비싼 도서만 살 수 있다고 알렸다. 이것은 캔버스 백 하나에 최소 780원이 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가로에 있는 "일시적 서점"은 입구에 있는 빨간색 차일(遮阳篷)이 각벽히 눈에 띄였는데 당시 가게 입구에 30~40명이 약 20~30미터의 긴 줄을 서고 있었다. 긴 대기 시간 때문에 몇몇 여성들은 양산을 쓰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기다렸다. 봉현로, 무강로의 매장 상황은 영가로점과 비슷했다. 봉현로 300번지에 있는 초록색 가게의 간판아래에는 예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 많이 서 있었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 커피를 사는 사람, 줄을 서 책을 사는 사람도 있고 블로거들이 영상을 찍기도 했다. 관계자는 "책을 사려는 사람은 위챗 미니프로그램을 이용해 명품브랜드 계정을 등록해야 입장할 수 있다"며" 오전에 가게를 열고 저녁 7시 30분까지 문을 닫을 때까지 줄곧 줄을 서는 사람이 있다. 이틀 동안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무슨 책이 그렇게 비쌀까? 세 곳의 "일시적 서점" 직원의 소개에 따르면, 가게 안에서 가장 싼 도서는 모두 290위안의 "도시 안내서"이며, 예를 들면 베이징 도시안내서, 상하이 도시안내서, 청두 도시안내서, 그리고 국외 도시의 도시 안내서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도시 안내서는 오전 중에 매진되는 경우가 많다. 무강로점의 가장 비싼 앨범은 한 권에 1,200원이고 봉현로점의 가장 비싼 도서는 한 권에 1,190원이다. 봉현로점의 직원은 다양한 가격대의 도서들이 "모두 잘 팔린다"고 말했다. 이번에, 세 곳의 "일시적 서점"은 붉은 색, 초록색, 노란색 세가지 색으로 꾸몄는데, 각각 베이징 도시 안내서, 상하이 도시 안내서, 청두 도시 안내서를 대표하며 내용은 호텔, 식당, 박물관 등 각 도시의 특색을 소개했다. "이 책들은 모두 예술가, 사진작가들을 초대해 창작한 것이다." “일시적 서점” 관계자는 예를 들어 상하이 도시안내서는 작가 진위청(金宇澄)을 게스트 카피라이터로 초대했고 베이징 도시안내서는 피아니스트 랑랑(郎朗)을 게스트 카피라이터로 초대했다며 밝혔다. 하지만 어떤 소비자들은 책에 관심이 없었다. 모 여성은 "정말로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캔버스 가방을 사기 위해서이며 온라인에서 사면 캔버스 가방이 없다"며 말했다. 이번 "일시적 서점" 활동은 6월 25일부터 7월 9일까지 지속되며, 현재 소셜 플랫폼에는 이미 많은 홍보 내용과 네티즌이 게시한 사진, 글이 있다.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이미 구매대행하는 암표상들이 나타났다. 상기 브랜드 캔버스 가방에 대해 인터넷에 730원, 800원, 심지어 1,200원을 초과하는 구매 대행 또는 양도 게시물도 올라와 있다.
-
개인 서류봉투(档案) 함부로 뜯어도 될까?최근, "엄마가 개인서류봉투를 뜯어 딸이 화가 나 우는"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다. 6월 26일, 사천성 루저우시(四川泸州市)의 한 여학생이 졸업후 개인서류봉투(档案袋)를 집에 가져가 보관하였으며 어머니가 뜯어본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고함쳤다. 엄마 장 여사는 "그때 서류봉투를 개인이 뜯어서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며 “오늘 딸의 정서가 좀 좋아졌고 어제는자신을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관련 기관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처리할 것이며 이미 발생한 일은 잘 해결될 것이다'며 말했다. 사사로이 서류봉투를 뜯으면 서류관리자질을 갖춘기관에 의해 접수가 거부될 수 있으며 상황이 엄중한 경우 신용서류(诚信档案)에 기록되어 향후 연구생시험, 공무원시험 등 중요한 시험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 서류를 전달하면 서비스 요금을 내야 하는가? 2015년 1월 1일부터 인사관계 및 서류보관비, 조회비, 증명비, 서류전달비 등 비용은 모두 취소되었다. 각지 인력자원 공공서비스센터는 졸업생들을 위해 서류전달 등 수속을 하고, 각종 공공취업과 인재서비스를 제공하며 그 어떤 비용도 받지 않는다. 졸업생서류란(毕业生档案)? 졸업생 서류는 학생이 졸업하기 전의 가정상황, 학업성적, 신체상황 등의 문서기재자료이며, 고용 회사에서 졸업생을 선발하고 채용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재학 중에는 학적파일이라 하고, 졸업 후에는 인사파일이라 한다. 서류에는 주로 대학교 졸업생 등록표, 학업성적표, 재학기간의 모든 상벌자료, 입단 입당 지원서, 졸업 전 신체검사표 등의 자료가 있다. 즉 개인경력의 기록이며 인사 관리와 서비스의 근거가 된다. 서류를 버리거나 서류를 분실하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 졸업생은 회사 입사후 인사부서에 자신의 서류가 제때에 도착했는지를 조회해야 한다. 만약 장기간 도착하지 않았다면 즉시 학교에 연락하여 서류 우편번호나 EMS 번호를 조회하고, 서류의 행방을 파악하여 장시간 지연으로 서류가 분실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만약 졸업생 서류를 분실하면 근무연수 인정, 직함심사, 정치 심사 등 처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개인이 서류를 보관할 수 있습니까? 인사부 규정: 유동인원 인사기록은 구체적으로 현급 이상(현급 포함) 공공취업과 인재서비스기관 및 인력자원사회보장부문의 허가를 받은 단위에서 관리한다. 개인 또는 타인의 서류를 보관하는 것을 엄금한다. 만약 개인이 보관하는 경우 최대한 빨리 인사 파일을 호적지 또는 현재 직장소재지의 공공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보관해야 한다. 서류는 왜 사사로이 개봉할 수 없을까? 1. 관련 규정에 따라 개인 서류는 기밀 서류에 속한다. 서류관리 권한을 가진 단위만이 서류를 확인, 검사하고 서류심사 밀봉할 수 있다. 서류보관 권한이 없는 개인이 서류를 개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봉된 서류는 진실성과 완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 2. 서류는 개봉된 후 관련 단위가 접수를 거부하면 서류는 "폐기"서류 또는 "사망”서류로 된다. 파일 재작성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롭다. 3. 파일을 사사로이 뜯은 후 인재시장에 의해 접수가 거절되고 접수가 거절되면 연구생시험, 공무원 시험 등이 영향을 받는다. 서류의 행방은 어떻게 되나요? 1. 만약 취직하였고 직장에 서류관리권한이 있으면 서류를 해당 직장에 발송할수 있다.만약 직장에 서류관리 권한이 없다면 직장소재지 인력자원시장에 위탁하여 관리할수 있다. 또는 출생지역의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국에 보내 관리할 수도 있다. 2. 만약 잠시 직업이 없고, 취업 대기 중일 경우, 서류는 대학교가 "우정EMS 표준택배" 형식을 통해 출생지역의 공공 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전달할 수 있다. 3. 만약 계속 연구생 시험에 응시한다면 서류는 출생지역의 공공 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보낼 수 있다. 만약 연구생 시험에 합격하면 즉시 서류를 입학하게 될 학교에 보내 학적서류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
中, 7월부터 수면 은행계좌(睡眠银行账户) 모두 취소하기로최근, 중국 농업은행은 7월부터 개인의 장기 사용하지 않은 통장 계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2022년 12월 말까지 5년 이상(5년 포함) 거래가 없고 예금 잔액이 0이고 기타 관련 업무가 없는 것이 포함된다. 최근 몇년 동안 은행 계좌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중에 “수면 계좌”도 적지 않다. 중국 인민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2022년 말까지 중국에 개설된 은행 계좌는 141억 6,700만 개로 이 중 개인 은행 계좌는 140억 7,400만 개입니다. "수면계좌"란 일반적으로 연속 3년 이상(3년 포함) 고객의 자발적 거래가 발생하지 않고, 계좌 잔액이 0이며, 신용카드, 개인 대출 상환 및 기타 대리 수취 대리 지불협의를 체결하지 않은 계좌를 가리킨다. '수면계좌' 왜 정리할까? 전신 네트워크의 신종범죄를 방지하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공안부 통보에 따르면, 은행 계좌 서비스가 모든 금융 서비스의 기초이기 때문에 불법 분자들이 이 분야를 노리고, 임대, 매매 등 수단으로 대량의 은행 계좌를 획득하고, 국제 도박, 돈세탁, 보이스피싱 등 불법 행위에 종사하고 있으며 2020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전신 인터넷 사기에 사용된 단위 은행 계좌만 5만 8,500개에 달한다고 한다. 만약 개인의 "수면 계좌"가 이미 정리되었다면 완전히 삭제되고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현재 각 은행은 “수면 계좌”에 대한 인정 기준이 아직 통일되지 않으며 정리 방식도 각각 차이가 있었다. 어떤 은행은 공고에서 "계좌를 해지한다"고 명시했고 어떤 은행들은 그 계좌의 금융 서비스 기능을 일부 제한했다. 계좌 소유주자들은 은행에서 발송한 안내에 따라 내용을 꼼꼼히 읽어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만약 고객이 계좌를 계속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6월 30일 전에 자발적으로 거래를 진행해야 하며 이 거래는 주동적인 결제거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입출금, 송금, 송금, 이체, 소비, 납부 등이며, 고객이 자발적 거래가 아닌 경우는 이자결제, 문자메시지 요금, 사법공제 등이 있다." 농업은행 관련 책임자는 '고객이 유효한 신분증을 가지고 은행전산망에 가서 계좌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확한 대책 외에도 카드 소지자의 합법적인 카드 사용도 매우 중요하다.이에 앞서 여러 지역의 금융관리부문에서는 은행 계좌 또는 지불 계좌를 임대, 대여, 판매, 구매하는 것은 위법 행위이며, 단위 또는 개인의 신용 기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미 명확히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카드 소지자는 두 가지 사항에 주의하여 자신의 합법적 권익을 지켜야 한다. 첫째, 자신의 은행계좌를 잘 보관하고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계좌를 판매하거나 임대해서는 안 된다. 카드 소지자는 일단 은행 카드가 분실된 것을 발견하면, 즉시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즉시 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 받아야 한다. 둘째, 보유하고 있는 계좌를 잘 보관하고 분류하여 관리한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은행 카드, 통장을 확실히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다면, 즉시 은행에 가서 계좌를 해지해야 한다. 만약 어떤 계좌가 주로 인터넷 소액 결제에 사용된다면, 그 계좌를 Ⅰ류 계좌에서 Ⅱ류 계좌, Ⅲ류 계좌로 강등시킬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개인 자금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위험을 더욱 잘 방지할 수 있다.
-
해변가에서 놀고 온 6세 남아 식뇌충(食脑虫) 기생충에 감염돼 생명 위독최근, 귀저우의 묘여사는 인라인에서 아이가 병에 걸려 치료받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올린 내용에 따르면 6세 아들 샤오딩은 해남도에서 여행하고 와서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고 10흘이 지나도 낫지 않아 여러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최근에는 중환자실까지 들어갔다. 6월 21일에 병원은 아이의 위독통지서를 내렸고 통지서에 급성 화농성 뇌막염으로 진단되었고 전간(癫痫)증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중추성 호흡부전, 기관지폐렴 등 증상이 있었다. 아이의 병상이 위독해지고 혈압유지가 안정되지 않아 수시로 병상이 악화돼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해변가에 놀러 갔을 뿐인데 어떤 원인으로 병상이 이렇게 엄중해졌을까? 묘여사는‘아이의 뇌척수액 검사결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개코원숭이아메바원충(狒狒阿米巴原虫)이라는 기생충인데 열대와 아열대에 생존하는 기생충이며 식뇌충이라고 한다’며 말하였다. 그러면서‘아이의 상태가 엄청 좋지 않은데 호흡기를 빼면 혼자 숨을 쉬지 못한다. 아이의 상황을 온라인에 올린 것은 다른 학부모들도 식뇌충을 경계하게 하기 위해서다’며 말하였다. 식뇌충감염으로 인한 뇌막염의 치사율은 98%에 달한다. 아메바뇌막염은 잠복기가 짧으며 약 5일 정도면 증상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비인두염 증상이 나타나다 두통, 발열, 메스꺼움, 구토 등 증상이 뒷따르고 신속하게 발전하여 환자는 경부가 뻣뻣해지고 의식장애, 의식모호, 평형을 잃고 환각, 호흡장애 등 증상으로 발전한다. 절강대학 의학원 부속 소아병원 감염과 주임 황모는‘식뇌충은 열대와 아열대에 생존하는 보기드문 기생충이며 물, 흙, 썩은 유기물속에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감염된 사람은 200명 좌우밖에 되지 않으며 중국은 수십건밖에 보고되지 않았다'며 말하였다. 식뇌충은 25℃좌우의 습하고 온난한 환경이 그들의 생존에 유리하며 42℃때 번식력이 왕성하므로 식뇌충감염은 주로 여름에 발생한다. 식뇌충은 피부감염과 뇌감염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농사일을 할 때 기생충이 피부를 통해 인체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천, 호수에서 수영하거나 식뇌충에 감염된 물로 코를 씻을 때 비강을 통해 대뇌로 들어간 후 신속하게 번식해 화농성 뇌막염을 유발해 혈관출혈과 뇌세포괴사를 일으킨다.
-
中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보조배터리 35% 이상 불합격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보조배터리를 검사한 결과, 35% 이상이 불합격이였다. 중국 9 개 성(시) 에서 95개 기업이 생산한 99개 제품 중 35개가불합격이며 불합격률은 35.4% 였다. 불량 배터리는 허위 용량 문제가 두드러져 충전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발열, 폭발 등 안전 위험이 있어 소비자와 재산을 위협한다는 점이 가장 돗보였다. 관련 업계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은 세계 최대 휴대용 전원 생산국이자 최대 소비시장으로 2020년부터 출하량이 1 억개를 유지하고 있다. 휴대용 전원이 널리 보급되면서 중국 곳곳에서 휴대용 전원으로 인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5 월 말 베이징 지하철 7호선에서 한 승객의 가방 안에 있던 휴대용 전원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연기가 순식간에 차량 전체를 휩싸았다. 다행히 지하철 안전인원의 신속한 처리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올해 5 월 강소성 장자강(江苏张家港)의 한 주차장에서도 자동차 안에 있었던 보조배터리로 인해 폭발이 일어났다. 차 안의 중앙콘솔은 심하게 파손되었고 앞 유리도 깨졌다. 올해 1월 초, 광서성 구이핑(广西桂平)의 건축 중인 민가에서 새벽에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하여 집안의 일가족 4 명이 불행히도 사망하였다. 소방당국의 경고문에 따르면 조사 결과 휴대용 전원에서 합선이 발생해 화재가 발생했으며 현장 검증 결과 이 제품은 위조품으로 의심된다고 밝혔다. 업계 전문가들은 '휴대용 전원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부적절하게 사용하면 안전사고를 유발할 수 있어 소비자와 재산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휴대용 전원은 완전히 충전되기까지 몇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플러그를 뽑는 것을 잊으면 하루 종일 충전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경우를 과충전이라고한다. 이번 국가감독 검사에서 5차례의 휴대용 전원 과충전 검사에서 불합격된 것을 발견하였다. 휴대용 전원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때 깜빡하고 전원을 장시간 충전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데 휴대용 전원의 내부 셀 품질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과충전 시 회로가 손상되더라도 화재나 폭발 등 위험은 없어야 한다. 어떤 휴대용 전원의 내부 셀은 실험 과정 중 갑자기 폭발이 발생하여 연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실험 후 불합격 휴대용 전원셀은 전부 타버렸다. 셀 품질이 과충전 지표가 불합격인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케이스의 품질이 안전하지 않으면 부딪치거나 떨어질 때 휴대용 전원 내부 회로와 셀이 효과적으로 보호되지 않고, 합선, 전기 칩셋(电芯漏液) 등 문제가 발생하며 화재 등 안전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이번 검사에서 발견한 불합격 제품에 대해 시장감독관리총국은 각 지방시장감독관리국에서 전자상거래 플랫폼 상품등록을 즉시 삭제하도록 독촉하고, 동시에 법에 따라 차압 등 조치를 취해 기업의 생산 판매를 금지한다. 불합격 기업에 대해 시정 요구를 한층 더 명확히 하고, 시정 조치를 구체화하도록 엄격하게 요구하며 신속히 재검사를 조직한다.
-
[중국한인역사] 청산리 대첩의 숨은 공로자중국 혼성단장 멍푸더(孟富德, ?~1950)로부터 중국을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은 북로군정서는 중국측의 곤란한 처지를 이해한 북로군정서는 지린을 떠나 막연히 백두산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범석 장군은 백두산에서 군대를 확장하고 군력을 기른 다음, 두만강을 건너 조국 한반도의 척추산맥 낭림산맥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서울 인왕산이나 북악산에서 일본군과 정당히 포문을 열고 민족적 항일전쟁을 전개할 구상이었습니다. 북로군정서는 시다퍼 사관연성소를 폐쇄하고 1920년 9월17~18일 장정길에 올랐습니다. 이동하는 병력 규모는 당지에서 모집한 보병, 연성대 사관졸업생, 기초교육을 막 시작한 보병, 소집한 지 며칠되지 않아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자들까지 합해 모두3개 대대였습니다. 이동을 위해 연성대와 보병대대를 여행단이라 개칭하고, 소 달구지 180량을 구입해 비품과 군장비를 실어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독립군 여행단 일행이 산다오거우(三道溝) 송림핑(松林坪)에 닿았을 때, 중국측이 대규모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다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하는 2개 사단 등 약 2만여 명 일본군이 독립군 주력세력을 뿌리채 뽑기 위해 포위망을 압축하며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독립단 대표들은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작전을 세웠습니다. 김훈은 북로군정서 사령부 제2연대에 배치되어 청산리 바윈핑(白雲坪)에서 일본군과 맞부딪쳤습니다. 10월 21일 새벽 5시, 독립군은 아랫 마을이 환하게 내려다 보이는 바이윈핑 고지에 매복해서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여기는 사방으로 산림이 빽빽하고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져 있어서 엎드리면 쌓인 낙엽에 파묻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분간이 안됩니다. 독립군들은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로 위장하고 숲 속에 엎드려서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오전 8시쯤, 일본군 전위 부대 1천여 명이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산림으로 들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일본군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가지고 있던 6백여정의 소총, 6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를 총동원해서 일제히 공격을 했습니다. 결과, 불과 30분만에 일본군 전위부대를 모두 섬멸시켰습니다. 이어 한 시간이 채 못되어 일본군 주력 부대 8~9천명이 겹겹이 밀집 횡대를 이루며 바이윈핑으로 들어왔습니다. 김훈 부대는 일본군복으로 위장하고 높은 지대, 유리한 장소에서 엄폐물을 이용해 탄환을 퍼부으며 좌우 양쪽으로 올라오는 일본군이 서로 싸우도록 유인했습니다. 아군 주력군이 좁은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적의 포성이 난무할 때 중간 지점을 지키던 김훈이 중대를 인솔해서 좁은 골짜기로 빠져나갔습니다. 이를 모르고 좌우에서 올라온 일본군은 자기네끼리 포격전을 벌여 2,200여명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독립군은 사망자 20명, 중상자 3명과 가벼운 부상자 수 십명 뿐 이었습니다. 청산리 마루거우(马鹿沟)에서도 김훈 중대는 산봉우리 유리한 고지에서 일본군이 포위망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했습니다. 일본군이 중포를 쏘며 계곡을 따라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소소의 독립군들이 총이 가열되어 손이 데일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맹사격으로 일본군을 저지했습니다.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崔麟杰, ?~1920)은 기관총과 운명을 같이 할 태세로 새끼줄로 기관총을 자기 다리에 묶고 한 탄대 120발 탄환을 단숨에 쏘았습니다.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에 겁을 집어먹은 두 동지가 진지를 이탈하여 숨으려고 하자 김훈은 총을 쏘아 이들을 쓰러뜨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냉철하게 계속 지휘를 했습니다. 1921년 2월, 김훈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인 윤기섭(尹琦燮, 1887~1959)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 갔습니다. 임시정부와 교민 200여명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환영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김훈은 그 자리에서 청산리전쟁 보고를 했습니다. 당시 청산리 전투에 동원된 일본군은 2만명이상이었고,독립군은 비전투요원까지 합쳐 겨우 2천 800여명이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대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군이 용맹하고, 복잡하고 특수한 산악지형에 익숙하고, 독립군은 홑옷에 짚신을 신어 산길을 걸을 때 기동이 민첩했지만, 무엇보다 마을의 동포 아낙들이 독립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치마폭에 밥을 싸서 지원해준 것이 전투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보고는데, 김훈의 보고를 들은 청중들은 흥분하며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김훈은 청산리, 봉오동전투에 대해 「北路我軍實戰記 」를 써서 『독립신문』에 연재했습니다. 이로써 애써 감추려고 했던 일제의 대패전이 세간에 드러나고 한인들은 항일의지를 고취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된 정예 군인김훈이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을 때, 젊고 훌륭한 교관이 부임했습니다. 신식 군사학교 윈난강무학당을 졸업한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이범석 장군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해 보니 군사지도자 감인 김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범석은 김훈을 조교로 발탁하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병사 135명을 선발했습니다. 이들로 교성대를 조직해 정예군을 양성해 국내로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범석은 먼저 정예군의 정신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정예군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작전을 창작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부대가 다 몰살하는 형세에 처해 한 사람만이 남더라고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유격술의 극치를 가르쳤습니다. 김훈은 이범석 장군을 도와 정예군을 양성했습니다. 1919년8월, 김좌진 장군이 북로군정서에 와서 사관연성소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관 이범석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범석은 조교 김훈을 데리고 북로군정서로 갔습니다. 이 때 김훈은 춘식(春植)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이범석과 김훈, 두 사람은 경비가 없어서 서간도 펑톈(奉天)에서 북간도 지린 왕칭현(汪淸縣) 화뎬(樺甸)현까지 오천여 리를 걸었습니다. 깊은 산골짜기와 높은 산, 밀림 속 무인지경을 약 20여 일 걸어서 1920년 2월 초, 매섭게 추운 날 왕칭현에 도착했습니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원시림이 빽빽한 시다퍼(西大坡) 스리핑(十里坪)에 세워졌습니다. 시다퍼 입구 좌우 산들은 별로 높지 않은데 들어갈수록 절벽 같은 높은 산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높이 둘렀습니다. 그 사이로 계곡이 지린 동부와 북부까지 약 120리를 흐르고 이 계곡 중간쯤에 동포 약 50호가 사는 조선촌이 바로 시다퍼입니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장은 김좌진(金佐鎭, 1889~1930), 교수부장 나중소(羅仲昭, 1866~1925), 교관은 이장녕(李章寧, 1881~1932), 김규식(金奎植, 1882~1931) 등인데 이들은 구한국군대식 방법으로 정신교육, 역사, 군사학, 호령법, 전투 훈련, 총검술, 군사학, 축성교범, 육군형법, 군대내무서, 야외요무령 등을 가르치다가 중국 윈난 강무학교에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이범석을 영입한 것입니다. 이범석은 사관연성소 교성대 대장에 김훈을 임명했습니다. 사관연성소는18~30세 청년들을 대상으로 6개월간 단기 속성으로 정예군을 양성했습니다. 1920년6월 기초훈련을 마친 사관연성소 군인이600명, 훈련중인 생도가 약 300명 되었습니다. 그해9월 9일,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으나 이들을 맡길 만한 보병대 편제가 없어서 졸업생 중 일부를 보병대 하급 간부로 임명하고 나머지 200명은 교성대로 편성했습니다. 이 무렵 일본군이 중국동북삼성 당국에 압력을 가해 북로군정서를 토벌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혼성단장 멍푸더(孟富德, ?~1950)는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는척 하면서 북로군정서로 하여금 지린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네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