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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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상무인원의 재중 근무생활 안내(2024년판)외국상무인원이 중국에서 사업하고 생활하는데 편리를 주기 위하여 중국 상무부는 관련 부서와 함께 "외국상무인원의 재중근무생활 안내"(外国商务人士在华工作生活指引)(2024년판)를 편찬하여 주의사항, 일상생활 서비스, 중국체류 및 거주 서비스, 재중 근무 관련 서비스의 4개 부분으로 나누어 숙박, 통신카드, 은행카드, 거류허가증, 취업허가증, 사회보험, 모바일 결제 개설, 교통수단 이용, 개인소득세 납부 등 사항을 포함하여, 외국상무인원의 재중근무생활에 참고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향후 관련 정책과 처리 절차의 조정에 근거하여 매년 갱신할 것이다. 주의사항 1. 중국에 입국한 후에는 되도록 빨리 숙박 등기를 한다. (1) 호텔에 입주하면 호텔에서 처리할 수 있다. (2) 다른 곳에 입주할 경우, 반드시 24시간 내에 거주지 파출소에 신고하여야 한다. 2. 중국에서 근무하며 생활하는 동안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1) 비자 유효기간에 주의를 기울인다. (2) 체류허가 유효기간에 주의를 기울인다. (3) 취업허가의 유효기간에 주의를 기울인다. (4) 기타 주의사항 1. 중국 소셜 플랫폼에 댓글을 남길 때 중국 법률 및 규정을 지켜야 한다.2. 강아지,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기르려면 관련 규정을 지켜야 한다.3. 중국에서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물, 장소 및 시설을 포함한 군사 시설을 촬영해서는 안된다. 3. 중국에서의 직장생활 빠른 도움사항 얻기인신 또는 재산이 침해되었을 경우 110으로 연락. 여권을 분실했을 때, 즉시 분실지 파출소에 분실 신고를 한다. 화재: 119구급차: 120 일상생활 서비스 1. 통신카드 발급. (통산사: 中国移动, 中国联通, 中国电信) 2. 은행카드 발급 3. 모바일 결제 개통 4. 외환 환전 처리 (1) 입국하기 전에 외국인은 관련 국가 또는 지역에서 인민폐 현찰을 사전 환전한 후 휴대하고 입국할 수 있다(출입국 1인당 매번 휴대하는 인민폐 한도액은 20,000위안이다). (2) 입국 후, 국제공항, 육로통상구, 항구 등 입국통상구 소재지의 상업은행 지점 카운터, 환전소, 셀프 환전기에서 환전할 수 있으며, ATM기를 통하여 국제은행카드를 사용하여 인민폐 현금을 인출할 수도 있다. 5. 교통수단 이용 6. 숙박 처리 외국인 관광객들은 씨트립 국제판 Trip.com 앱을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 등으로 호텔을 예약할 수 있다. (1) 여권, 외국인 영주 신분증 등 유효한 증명서를 제공하여 호텔 프론트에서 등록해야 한다. (2) 매장 방문 결제 방법은 현금(인민폐), 은행카드, 알리페이, 위챗을 선택할 수 있다. 카드 결제는 Mastercard, Visa 등 국제은행카드 접수 여부를 미리 문의해야 하며 일부 호텔은 Apple Pay와 PayPal 등의 결제 방식을 지원하므로, 결제 전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중국체류 및 거주 서비스 7. 비자 연장 수속 8. 거류허가 처리 재중 근무 관련 서비스 9. 취업 허가 신청 10. 사회보험 처리 11. 개인 소득세납부 참고사이트: 深圳出入境: https://mp.weixin.qq.com/s/4kX32MQ2WUA-Fv2f6LBs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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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폐원조에 43세 민영 유치원 원장, 양로업으로 전환출생률이 떨어지면서 유치원도 원래의 들어가기 어려웠던거(难进)에서 원생이 없는 상황(没人)으로 변해가고 있다. 유치원이 폐원되면서 교사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공립유치원은 “탁유일체화”(托幼一体化)를 시작했다. 43세의 민영 유치원 원장은 양로업으로 전형을 시도했고 90后교사들도 일자리를 바꾸었다. 업계 관계자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힘든 것에서 지금은 원생이 없는 과정을 보아왔다. 폐업조에 제때에 전형을 해야 했고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 점이 많이 아쉽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며 전했다. 43세의 위모는 2003년부터 유치원을 경영했고 2020년까지 총 11개의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현재는 8개 유치원밖에 남지 않았으며 원생도 절반으로 줄었다. 중년에 다시 창업을 시도하는 1~2년 동안 머리가 모두 희졌다’며 전했다. 탕탕은 유아교육에 10여 년 종사했으며 “2008년 때 급여가 1,200~1,500위안밖에 되지 않았다. 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몇 천위안밖에 오르지 않았다. 유치원 교사의 복리후생이 좋지 않으며 최근 몇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며 말했다. 누리꾼들은 "3년 유치원에 들어간 돈이 예전 6년 초등학교 다니는 비용보다 더 많다", "둘째가 태어난 후 분유부터 유치원비용까지 15만 위안정도 들어갔다", "대학보다고 비싸다. 일반 본과학비에 기숙사비용까지 6,000위안인데 유치원은 만 위안이 넘는다"며 아이를 출산하는데 부담감을 느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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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홍 케이크점(熊猫不走) 부도, 천여명 직원 급여 발급하지 못해최근, 디저트 브랜드 “판다는 가지 않는다”(熊猫不走) 공식웨이보는 판다는 가지 않는다 케이크의 창시자는 연락 투절이고 3~4개월 동안 천여명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고 사회보험도 납부하지 않고 딩딩회사단체방(钉钉)도 해체된다는 소식을 올렸다. 회사 직원은 “회사는 3월 16일에 갑자기 업무정지라고 발표하였고 많은 배송원들은 해산될 때까지 여전히 케이크를 배송하고 있었다"며 말했다. 직원이 제출한 캡쳐화면에 따르면 회사가 부도나기 전, 회사 창시자 양전화(杨振华)는 업무단체방에 회사 관리 및 코로나 등 내외부원인으로 회사를 되살리지 못했다며 채무를 갚을 형편이 되지 않아 법원, 공안의 처리를 받겠다고 밝혔다. 3월 16일 저녁, 호남 장사의 배송원 정모는 “8개 케이크를 배송하고 마지막 케이크를 배송하던 길에 회사 부도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업무단체방 해산을 보고 많이 속상하고 앞이 막막해졌다. 아직 2개월 급여를 받지 못했다”며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달부터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달 급여는 두번에 나눠 줬는데 아직 2개월 급여 만 위안을 받지 못했다.”며 전했다. 항저우에서 운영을 담당하던 임모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회사 단체방을 확인했을 때 회사 업무회복이 어렵게 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루 전 만해도 영도로부터 이튿날부터 정상 출근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말했다. 지난해 8월에 입사해서부터 임모씨는 첫 달 급여만 제때에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은 급여일은 3월 11일이며 아직 3개월 급여를 받지 못했고 업무과정에 발생한 비용도 받지 못한 상황이다. 회사 단체방이 해산된 후 직원들이 새로 만든 단체방에 240여 명이 가입했고 그들이 받지 못한 급여는 최소 2,000위안, 최고 5만 위안이고 대부분 직원들이 받지 못한 급여는 5,000-10,000위안 정도이다. 직원들은 “회사측은 그들에게 이직수속(离职手续)을 처리해주지 않았고 배상에 관한 내용도 협상하지 않았다”며 밝혔다. 직원들이 회사 부도소식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일부 소비자도 마지막 날에 여전히 온라인 쇼핑몰에서 제품을 구입하고 충전했다. 3월 16일 점심, 혜주의 샤오리는 온라인플랫폼(熊猫不走蛋糕预定平台)에서 179위안짜리 남편의 생일케이크를 구입했는데 저녁 7~8시가 되어도 배송을 해주지 않아 고객서비스를 연락하려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근처 케이크집에서 새로 구입하게 되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熊猫不走) 브랜드는 2017년에 설립되었으며 주로 온라인에서 주문을 받고 창고에서 배송하는 생일 케이크 판매와 배송서비스를 제공하였다. 2019년 11월까지 회사는 약 500만 명의 사용자가 있으며 월 영업액은 3,000만 위안이 넘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는 매개 도시에 생산중심을 설립하고 생산중심에서 주변 배송점으로 보내고 판다 옷을 입은 배송원이 집까지 배송하고 노래와 춤, 마술, 게임 등이 그들의 판매 포인트였으며 많은 소비자들이 좋아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는 혜주, 불산, 동관, 주해, 중산, 청두, 하문, 장사, 중경, 항저우 등 2, 3선 도시와 광저우, 심천 등 1선 도시에도 배송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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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앙은행, 외국인들의 편리를 위한 지불안내 발표, 카카오페이도 사용가능지불서비스 최적화를 위해 중앙은행은《중국에서 외국적 인원들의 지불안내서》(外籍来华人员支付指南)를 발표하였으며 모바일지불, 은행카드, 현금 등 각종 지불서비스의 사용과정을 소개하였다. 은행카드 만약 UnionPay, Visa, Mastercard가 있는 은행카드를 소지하면 상응한 표식을 인식할 수 있는 가게에서 카드를 사용하여 지불할 수 있으며 만약 표식이 없으면 종업원에게 소지한 카드로 지불을 할 수 있는지 여쭤볼 수 있다. UnionPays카드는 중국내에서 은행카드로 지불할 수 있는 상가에서 모두 사용가능하다. 모바일지불 핸드폰 하나로 편리한 지불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즈푸보, 위챗지불, 윈산푸(云闪付)를 선택할 수 있다. 모바일지불제품을 더욱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일정 금액 이하의 거래는 신분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 즈푸보는 핸드폰 응용시장(应用市场) 혹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다운하고 핸드폰번호로 등록한 다음 은행카드를 바운딩할 수 있다. (Visa, Mastercard, JCB, Diners Club, Discover 등 은행카드만 가능). 다음은 즈푸보 시작페이지의 스캔과 큐알코드을 이용해 지불한다. 위챗는 핸드폰 응용시장에서 위챗 App를 다운하고 핸드폰번호로 등록한 다음 은행카드를 바운딩한다. 위챗지불은 Visa, Mastercard, American Express, JCB, Diners Club, Discover 등 은행카드를 지원한다. 지불방식은 즈푸보와 동일. 윈산푸(云闪付)는 핸드폰 응용시장 혹은 공식홈페이지에서 다운하며 핸드폰번호로 등록한 다음 지불기능을 개통한다. 현재 윈산푸는 홍콩, 마카오 등 특정지역에서 발행한 은행카드만 바운딩 가능하다. 일부 해외 지역 전자지갑도 중국내 상가에서 사용가능 만약 아래와 같은 전자지갑이 있는 사용자는 현재 지갑으로 지불할 수 있으며 별도로 기타 App를 다운하지 않아도 된다. 현금 만약 현금이 필요하면 은행카드로 화폐청산 협의가 있는 ATM에서 인민폐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 그리고 화폐환전 표식이 있는 은행, 외환환전기관과 셀프환전기(自助兑换机)로 인민폐를 바꿀 수 있다. 환전이 가능한 화페는 현장 직원에게 확인해야 한다. 여권 등 유효증서로 근처 은행에서 외환은행계좌를 설립할 수 있으며 공상은행, 농업은행, 중국은행, 건설은행 및 교통은행 등 상업은행에서 모두 계좌개설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구체적인 개설조건은 은행에 문의하거나 은행 공식홈페이지에서 조회할 수 있다. 계좌를 개설한 수 인민폐와 외환의 적금, 인출, 중국내에서의 자금이체, 환전 및 지불 등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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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투어'가 인기를 끌어, 4일 동안 144만 명의 고객을 맞이올해 춘제기간 동안 허난성쉬창(河南许昌)의 체인슈퍼마켓인 팡둥라이(胖东来) 산하의 3개 마트들은 4일 동안 144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맞이하여 허난성 관광객 1위 관광지를 제치고 심지어 중국내 유명 명승지보다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여 네티즌들의 마음속에 "6A급 관광지"로 자리매김되었다. '슈퍼마켓 투어'가 인기를 끌면서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뀌었다. 슈퍼마켓이 풍경 명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까? 관광객들은 항상 쇼핑단(购物团)을 가장 싫어하는데, 어떻게 한 쇼핑 장소가 하필 관광지가 될 수 있겠는가? 문화관광 소비가 전통명승지에서 도시 생활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충칭 리즈바(李子坝)역에서(건물을 뚫고 지나가는 전철) 시작하여, 리본을 단 발코니 때문에 상하이로 가고, 불냄새 가득한 꼬치구이를 위해 쯔보(淄博)로 가고 작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City walk"까지, 모두 문화관광 소비가 관광지에서 도시로 확장된 결과이다. 관광객의 관심사가 풍경과 명승지를 보는 것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보는 것으로 변함에 따라 관광업 발전은 사람의 주관적인 능동성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준다. 팡둥라이의 폭발적인 인기와 좋은 평판에 힘입어 현지 정부는 적극적으로 관련 비즈니스 여행, 연학 관광을 전개하고, 경전철역과 고속도로에서 팡둥라이 마트로 직통하는 버스 전용선을 개통한다. 춘제 기간에 쉬창시인민대표대회, 정협 대원과 관광 서비스 센터 등 공공 주차 공간은 계속해서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이러한 조치는 관광객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좋은 평판을 형성하고 소비 데이터에 반영하여 쉬창은 춘절 연휴에 "관광객 817.6만 명, 전년 동기 대비 173% 증가, 관광 종합 수입 50.69억 위안, 전년 동기 대비 543% 증가"라는 눈부신 답안을 내놓았다. 문화관광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도시들에 있어서, 시장 질서를 유지하고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부 지역은 바가지 요금 때문에 허위 홍보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올라갔고, 쯔보 바비큐와 하얼빈 여행은 저렴하고 믿음직스럽다. 팡둥라이 또한 각종 성실경영의 세부 사항으로 인기가 있는데, 예를 들면 황금 액세서리는 소량의 가공비만 받고, 차(茶叶)는 과대 선전하지 않고, 가격을 허위로 표시하지 않는 등이 있다. 이런 경영방식은 다른 마트에서는 보기 드물며 일반 정찰가보다 소비자들을 더 감동시킬 수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팡둥라이에 가는 것은 정직하게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존경과 열망을 표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소비자 주변의 소비환경이 만족스럽지 못하며 지속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것은 기업과 도시에 있어 정직한 경영의 소중한 가치를 보여준다. 한 도시가 만약 외부에 신용을 지키려는 신호를 전달한다면, 더 많은 소비자들이 그것을 여행 목적지나 소비 장소로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동시에 음식, 숙박, 교통 및 기타 산업을 활성화하고 비즈니스 환경을 최적화하여 도시 경제 번영을 촉진하는 선순환을 형성할 것이다. 단체 관광과 구매 대행의 빈번한 방문으로 인해 원래 지역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주력하던 팡둥라이는 압박감을 느꼈다. 사실 전국 5,800만개 이상의 기업 중 많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고품질 서비스와 체험을 제공하여 시장경제의 건전한 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 다가오는 3.15라는 특별한 날에 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기업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이다. 동시에 더 많은 기업과 도시가 신용경영의 대열에 합류하여 공정하고 투명하며 건강한 소비환경을 공동으로 조성하여 소비자의 권익을 더 잘 보호하고 시장경제의 활력을 방출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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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웃으시는 볌재 김규흥범재 김규흥의 후손이 소지하고 있는사진중에 범재 김규흥이 광동성 후이저우뤄푸산(惠州罗浮山)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편지 뒷장에서 산천 경관이 멋지고 깍아지른 듯 험하고 깊은 뤄푸산에는 위당 전병준씨가 수도를 하고 있어서 전병준을 통해 “참동계”라는 책을 읽었고 명산을 알게 되었으며 기회가 생겨 풍경을 즐겼다고 사진 뒷장에 썼습니다. 이 글을 쓴 날은1910년 3월 13일입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취당 전병준이고, 풍요로운 얼굴에 두 손을 무릎위에 가만히 얹어 있는 사람이 환제 왕은장(王恩章)이고, 긴 수염에 맨 가에서 빙그레 웃으며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또 후어저우를 관할하는 왕은장의 병사가 여행길을 녹 호위했고 뤄푸산에서 십여일을 머물고 돌아오는 길에 몇몇 관공서에 들러 정겨운 말들을 나누게되어 즐거웠고 이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고 썼습니다. 광저우에서 뤄푸산까지 약 70-80킬로미터, 뤄푸산에서 십여일 머물고 또 몇몇 관공서를 시찰하는데 며칠을 소요했고, 광저우에서 뤄푸산까지 오고 가는 시간을 합치면 약 한 달을 뤄푸산 여행에 소요했습니다. 김규흥이 보관하던 동맹회의 비밀문건과 물품들을 가지고 뤄푸산으로 도피했다고 추정하는 대목입니다. 사진 뒤에 글을 쓴 날이 1910년 3월 13일인데 2월 12일 신군기의 후, 한 달이 지난 시간입니다. 신군기의 실패로 인해 신군 100여명이 무참히 희생을 당하고 작전을 지휘하던 예잉뎬은 사형을 당하고 가담한 중국 혁명인들은 모두 홍콩 등지로 피신을 했습니다. 청정부가 혈안이 되어 혁명인을 체포하는지라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쓴 김규흥이 혁명당원이라고 의심도 받지 않으면서 극도로 위험한 물품을 가지고뤄푸산으로 피했다고 봅니다. 비록 도피하는 시간이었지만 김규흥의 뤄푸산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왜 즐거웠을까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듯, 중국혁명의 깊숙한 현장에 들어가서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했고, 또 지역 정부와 어떻게 협력하는지도 확인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우리 독립운동에 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고 심중에도 확신이 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뤄푸산 여행 이후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돌아가실 때까지 빙그레 웃음을 띄울만큼 즐거운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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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도시들에서 20w+의 연봉을 받는 여성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최근, 여러 직업 플랫폼에서 여성 직장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직장 여성의 평균 월급은 증가하고 남녀 임금 격차는 5년 동안 점차 좁혀지는 추세를 보였다. 올해는 더 많은 전업주부들이 직장에 복귀했는데 선전과 같은 도시에서 더 두드러진다. 1.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연봉이 20만 위안 이상의 여성 인재가 절반을 넘었고 선전, 광저우가 각각 3위, 5위를 차지했다. 리에핀(猎聘)이 발표한 “2024 여성인재 데이터 인사이트보고서”에서 2024년 1~2월 여성인재가 가장 많은 도시 TOP 20을 보면 베이징, 상하이, 선전, 항저우, 광저우에서 연봉 20만 위안 이상의 여성이 각 도시의 30%를 초과하여 상위 5위를 차지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52.53%, 51.46%, 선전 41.88%, 항저우 34.68%, 광저우 30.79%이다. 2. 여성과 남성의 임금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고, 전문 서비스 감소 폭이 가장 두드러졌다. 5년 연속 1급 업종의 남녀 인재 평균 연봉을 보면 IT/인터넷/게임, 부동산/건설, 소비재, 의료건강, 전문서비스 등 5개 업종의 남녀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 1년 동안 남녀 구직자 검색어 TOP50을 비교한 결과, 기업 유형측면에서 남성들은 국내 기업에 특히 자동차회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국내 전문 자동차회사는 5개(비야디(比亚迪), 리오토(理想汽车), 니오(蔚来), 지리(吉利), 샤오펑(小鹏))이 있으며 신에너지차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성들은 외국 기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외국 기업은 7개가 있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운전 감각과 자동차 관련 분야를 좋아하는데 현재 자동차 분야에서는 신에너지차가 가장 인기있다. 여성은 대부분 생활과 일의 균형을 추구하는데 외국 기업은 종종 이런 분야에서 잘 한다. 3. AIGC 분야 일자리: 제품 매니저 여성이 가장 많아 지난 1년(2023년 3월~2024년 2월)동안 여성 배달 AIGC 분야의 3급 직능 특면에서 제품 매니저가 1위를 차지했으며 시장, 브랜드, 콘텐츠, 디자인 및 운영과 같은 AIGC 응용프로그램과 밀접하게 관련된 직능이 2~7위를 차지한다. 일자리는 모두 여성 종사자가 많고 여성이 더 잘하는 일자리이다. 특히 AIGC 분야의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알고리즘 엔지니어가 8위를 차지했으며 자연어 처리(自然语言处理), 데이터 주석(数据标注), 딥러닝 등의 기술직도 TOP 20에 포함됐다. 4. 미혼 직장인 10명 중 4명 "결혼을 재촉당했지만 애인 없어" 즈렌자오핀(智联招聘)이 발표한 “”2024년 중국 여성 직장 현황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미혼 직장인의 42.8%가 '결혼을 재촉당했지만 애인은 없다'는 이유로 1위를 차지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50.8%로 여성의 35.8%보다 높았다. 5. 직장 여성의 절반 이상이 여가시간에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택한다. 여가 시간, 직장 여성의 삶은 다채롭다. 남성보다 '가정적'인 직장여성은 올해 54.6%가 여가시간에 가족과 함께 할 것이라고 답해 남성(46.7%)보다 높았고 지난해의 46.2%보다 높은 수치다. 6.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에 복귀하는 전업맘의 비율이 작년보다 높아졌다. 기혼 여성중 80% 이상이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만 키운 경험이 있다. 이 중 19.7%의 여성이 전업맘으로 일했지만 자아실현을 위해 올해 직장에 복귀해 지난해 17.1%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해 전업맘의 자아가치 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7. 배우자에게 인정받는 워킹대디들 육아는 부부의 공동 책임이며 기혼 여성의 경우 61.9%가 배우자가 육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해 작년의 28.9%보다 크게 높아져 워킹대디의 활약이 더인정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육아에 최선을 다한다는 응답은 남성이 65.6%로 여전히 여성보다 높았고 '육아'에 대한 아빠와 엄마의 '평가 기준'은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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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재 김규흥, 3.1운동의 주역인가? 임시정부의 밀정인가?1919년 기미 3.1운동은 누가 획책했을까요? 우리 역사계는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3월3일, KBS 3.1절 특집으로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도 “광복70년 특집 다큐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을 방영했습니다.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김규흥 지사의 숨은 노력과 영향을 찾아서 굴절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쓰려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KBS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밀정이었다는 다큐를 제작 방영했습니다. 동경국회도서관 미정리자료중에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의 서신모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김규흥과 우쓰노미야가 주고 받은 편지 두 통이 있는데 그 중에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쓰노미야에게 돈을 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10월 초, 김규흥이 돌연 서울에 나타나 10월 2일, 4일, 9일, 16일, 19일 모두 5차례 우쓰노미야를 만났습니다. 우쓰노미야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조선군 최고 지휘자입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조직을 붕괴시켜 해외 조선인을 단속하기 위해 우스노미야는 첫 만남에서 상하이임시정부를 없애고 내외의 독립파를 개심시키려는 계획으로 김규흥을 회유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규흥은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희망이 없는 독립운동은 더욱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이다.”라며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가부 답변은 없었으나 우쓰노미야는 일이 잘 된 것으로 보고 김규흥에게 여비조로 200엔, 노모 방문시 100엔을 주었습니다. 현재 시가로 치면 100엔은 200만원가치이며 김규흥의 서울 방문과 환심을 사기 위해 우쓰노미야는 모두 7-800만원 정도의 돈을 지급했습니다. 10월 28일 김규흥이 상하이로 돌아와 우쓰노미야와 두 차례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우쓰노미야의 1919년 11월 27일 일기에 ‘상하이 김복(김규흥)이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규흥은 상하이 독립운동가 200여명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가 60여명이고 그 가운데 최근 20여명이 귀국하게 되어 나머지 40여명을 대상으로 회유하려면 경비가 20-30만원이라고 하며 당장 필요한 액수는 베이징 3만원, 상하이 2만원정도를 즉시 지급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김규흥을 연구한 배경한 교수는 우쓰노미야 일기 속에 나타나는 김규흥의 언행과 편지 내용을 보면 김규흥은 독립운동을 배반하고 친일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이나 우쓰노미야면담 이후 김규흥의 일련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친일 전향이나 친일행위와는 구별되는 면모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짜 친일전향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김규흥의 가짜 친일전향 의도는 무엇일까요? 1919년 11월 초,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흥은 중한합작은행 흥국실업은행을 발기했습니다. 은행설립 자금을 우쓰노미야로부터 얻어내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김규흥이 임정 요인 회유자금으로 요청한 2만원은 2010년 기준으로 한국돈 약 4억정도입니다. 이로써 보면 김규흥의 ‘친일행위’는 은행설립 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모모하다고 할 만큼의 ‘위험한 거래’였으며 우쓰노미야 접근과 동시에 추진한 은행설립은 그가 일생동안 동립운동 방략으로 추구해 온 둔전병 양성을 위한 자금 마련책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 결론’입니다. (참고: 배경한,「독립운동과 친일의 경계-재중 독립운동가 金奎興의 宇都宮太郞 조선군사령관에의 접근 문제」,『歷史學報』제244기(2019.12) 김규흥이 요청한 자금(회유 공작비와 은행설립자금)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김규흥의 친일전향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행위는 1920년 4월 푸젠성(복건성) 장저우(漳州)에서 한국 대표 김규흥과 여운형, 중국 대표 천종밍, 러시아 대표 포타포프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모색한 것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교두보로 장차 중국과 러시아 침략 기회를 노렸으니 한국, 중국, 러시아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대결이 불가피한 동병상련의 관계였습니다. 포타포프가 레닌에게 요청하여 시베리아의 모 지역을 조차하고 무기는 러시아가 담당하고 자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부담하고 한국은 병력을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6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양성할 수 있는 병영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중.러 3군 연합군을 중국은 북경정부 타도에 사용하고 그 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 한.중.러가 연합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3국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입니다. 장저우회의 직후, 김규흥은 회의결과를 가지고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 안창호를 만났습니다. 시설이 완성되면 도산선생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도덕과 권위로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도산이 거절해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21년 9월 23일, 신규식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임시대총통 쑨원을 방문할 때 김규흥은 김기제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유명한 관민들과 협력하여 중한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광명』을 발행 했습니다. 1922년 11월 4일, 흥국은행 정식 개업허가를 받고 북경에서 한중합작북경흥화실업은행을 개업했습니다. 이사장은 김규흥이었습니다. 은행설립 목적은 내몽고에 광대한 면적을 개척하여 동삼성(東三省)에 거주하고 있는 100만 동포를 이주시켜 편안히 살게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시설을 건설하여 둔전병을 양성하려고 했습니다. 후에 조선총독부 정보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흥화실업은행은 10만엔의 출자금을 모으려고 계획했으나 실제로 모인 자금은 1만엔도 못되고 그마저 중국인 張甑文이 3만여엔을 가지고 잠적해서 폐업했다고 했습니다. 상하이로 쫒겨났던 쑨원이 광저우를 수복하던1923년, 그 해 3월 1일, 김규흥은 김기제(金奇濟)라는 이름으로 광저우에서 삼일한국독립선언 4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1924년 김규흥은 황푸군관학교 군의(軍醫) 심장(審長)이었습니다. 순더(順德)에 소재하는 우톄청(吳鐵成) 군부대에 근무하며 광저우에 와서 의열단 월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습니다. 윤봉길의거 이후, 1932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한국독립당 기관지『韓聲』에 「유일당만이 비로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글도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망명생활 28년간 오로지 조국 광복의 대업만을 매진했으나 김규흥의 말년은 외로왔습니다. 이질병이 있었는데 병세가 악화되고 노환마져 겹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오랫동안 병상을 지키다가 1936년 8월 16일 톈진(天津)에서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해는 김규흥 지사가 세상을 떠난지 86년이 됩니다만 우리는 아직 그의 항일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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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후한민신해혁명이 성공하고 광동군정부의 고관이 된 김규흥은 자신이 앞에 나서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한 예관 신규식을 앞세워 1912년 7월 항일결사단체 동제사(同济社)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과 중국이 협력해서 조직적인 한국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로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도 조직했습니다. 신아동제사에는 후한민(1886~1936), 송자런(宋敎仁,1882~1913), 천치메이(陳基美,1878~1916) 등 30여명인데 모두 중국 국민당의 주요인사들이었습니다. 후한민은1968년 대통령장을 추서한 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입니다. “1912년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고, 1921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신규식이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을 만날 때 배석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1926년 러시아에서 데려온 한인 청년 10여명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등의 공적이 있습니다. 1912년, 쑨원이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후한민은 "제2의 총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쑨원과 사이가 밀접한 비서장이었습니다. 쑨원이 자신의 이론과 어긋나는 일을 하면 후한민이 명확하게 잘못을 지적했고 쑨원은 그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호한민의 원적은 장시성(江西省) 지안(吉安)이지만 조부가 청나라 관원으로 광저우에 부임하여 광저우에서 출생했습니다. 12세가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고 이어 모친과 형제 네 명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모두 잃었습니다. 후한민은 16세부터 서생이 되어 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01년 3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향시가 있었는데 생원 1만 명이 응시를 하고 거인(擧人) 80명을 뽑았는데 후한민도 거인에 당선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후한민은 호구지책으로 고관 자녀의 과거시험을 대신 치르고 은 6천냥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청나라 정부와 일본공사의 마찰이 있어서 후한민은 광동유학생 대표로 청조편을 들었는데 입학한지 두 달만에 퇴학을 당해 귀국을 했습니다. 1904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왕징웨이(汪精卫, 1883~1944), 주즈신(朱执信,1885~1920), 랴오종카이(廖仲恺,1877~1925) 등 미리 일본에 와 있던 옛친구들을 만났습니다. 1905년 여름, 랴오종카이와 광저우로 돌아와 휴가를 보내다가 쑨원이 일본에서 동맹회를 창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호한민 부부와 랴오중카이 부부는 곧장 일본으로 가서 주택을 임대해 쑨원을 초대했습니다. 후한민은 쑨원과의 첫 만남에서 쑨원의 사람이 되고 부인과 여동생, 랴오중카이와 동맹회에 가입했습니다. 호한민은 쑨원의 혁명이론가가 되었습니다. 후한민이 쓴 《민보의6대 주의(民报之六大主义)》는 쑨원의 혁명강령이 되었으며 쑨원과 후한민은 광저우에서삼민주의,오권헌법(五权宪法), 건국방략(建国方略), 건국대강(建国大纲) 등을 집필했습니다. 쑨원 이론에 대한 문제점은 자신의 이해를 겯들여 설명을 했기 때문에 쑨원 혁명에 대한 후한민의 이론은 명확하고 명료했습니다. 1905년10월,일본에 체류하던 혁명파와 보황파(保皇派)가 기념회 시간을 빌어 각 파의 의견을 발표하는데 후한민이 혁명파 대표로 강단에 올라가 3시간동안 거침없는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천 여명 청중이 일어서 끝없는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서 보황파 대표로 나온 캉요우웨이(康有爲)와 양치차오(량계초)의 제자들이 감히 변론 강연을 못했다고 합니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고, 이어 각 성에서 군정부를 설립했습니다. 광동성 군정부는 1911년 11월 9일에 성립되었습니다. 당시 쑨원은 국외에 있었음으로 후한민이 광동 도독(都督)에 취임하고 산하에 군사부, 재정부, 민정부, 재정부, 사법부, 외교부, 교육부, 교통부를 설치했습니다. 그 해 12월 21일 쑨원이 중국으로 돌아오자 후한민은 중화민국 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광동도독직을 사임하고 난징으로 떠나고 천죵밍이 광동도독 직무를 맡았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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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이 체험한 신군기의(新軍起義)1910년 경술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신군기의(新軍起義)는 범재 김규흥에게 있어서는 중국혁명을 깊숙히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905년 청나라 말엽,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많은 지식청년들은 신군에 입대해서 나라의 출로를 찾았습니다. 청정부는 재래식 군인의 형상을 개선하기 위해 신식장비와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고 사병들에게는 다른 군인보다 월급도 많이 주고 세금 혜택도 주면서 신군을 양성했습니다. 쑨원을 위시한 민주혁명파들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들과 협력해서 청나라를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신군들은 지식인들인지라 새로운 사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동맹회 회원들은 신군으로 위장 입대하고, 군대 내에 ‘과학 학습반’ 등 학술모임을 조직해서 비밀히 민주 혁명을 홍보했습니다. 발각이 되어 모임이 금지되면 또 다른 모임을 만들어 신군 사병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신군내 3천여명이 동맹회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안후이성(安徽省)에서 활동하던 예잉뎬(倪映典)은 신분이 노출되어 광저우 신군에 입대해서 전문적으로 혁명활동을 했습니다. 전체 신군의 절반 이상이 동맹회회원이 되었으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예잉뎬, 자오성(赵声, 1881~1911) 등은 1910년 경술년 2월 24일 정월 대보름에 광저우 신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시사화보(時事畵報)>는 민주혁명을 고취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청정부에 눈에 띄지않게 조심히 쿠데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2월 9일, 사소한 문제로 사병과 순경 사이에 시비가 붙어 사병 2명이 체포되고 신군내 동맹회 회원 명단을 입수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대담한 행동을 눈치 챈 청정부는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날씨가 습하다는 이유로 부대에 있는 모든 총과 폭탄을 다른 곳에 옮기고 습한 날씨가 지나가면 다시 원래 위치에 갖다 놓겠다고 가져 갔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예잉뎬 등은 예정일을 앞당겨 1910년 2월 12일(음력 1월 3일)에 신군 300여명을 인솔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창고 담당자를 살해하고 탄환과 무기를 탈취할 예정이었으나 무기고는 텅비었고 무기가 감추어진 사실을 몰랐던 신병들은 청정부에 의해 진압을 당했습니다. 예잉뎬은 피살당하고 조성은 홍콩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경술년신군기의(庚戌新軍起義)’라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