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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일부 관광지에서 담장 세워 경치 가려 온라인에서 화제최근, 일부 관광지에서 담장을 세워 풍경을 가리는 행위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부 관광지는 사회의 의견을 수집해 적극적으로 시정했지만 일부 관광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만약 종합적으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담장으로 경치를 가리는 것이 관광지 경영에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환경영향평가, 청문회 등 법정 절차를 거치지 않은 담장 요금은 자연환경의 전체적인 경치를 파괴하고 야생동물의 생존 공간을 분리하는 위험이 존재하며 여행업 발전은 사회적 효익, 경제적 효익 및 생태효익의 상호 통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여행법의 원칙과 어긋나고 일부 경영자가 여행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담장을 세워 경치를 가리는 것은 또한 일부 관광지 수입이 입장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설명한다. 일부 오래된 관광지는 비록 풍경 명승지를 가지고 있지만 유람 내용이 단일하며 서비스가 한정되어 있고, 관광지 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여행객을 사수하고 고가의 입장권을 통해 경영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담장의 실질적인 수익 증대 효과에 의심을 품게 된다. 인터넷 시대에서 각종 여행공략, 안내노트를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여행 정보의 차이가 극도로 줄어들고, 하나의 벽은 관광지의 신비감을 증가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 명성을 듣고 찾아온 여행객들은 무료로 멀리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표를 사서 정원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가는 행인들에게 있어 높이 솟은 칸막이와 비싼 요금은 오히려 관광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 길게 보면 담장을 세워 경치를 가리는 것은 관광지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현재 중국관광업계는 기초 관광 상품을 제공하는 것에서 양질의 여행 체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중이며, 입소문은 나날이 여행객들이 소비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점점 많은 도시들이 여행객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친근한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담장을 세워 경치를 가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길을 거꾸로 가는 것이다. 장애물을 설치하여 여행객에게 입장권을 판매한다 할지라도 소비자의 마음이 편하지 않고, 다시 찾아오거나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관광지는 여행객과의 게임에서 단기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역효과를 보게 된다. 관광지의 입장권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완화하는 것은 상품과 서비스의 다원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관광지 내의 음식, 숙박, 여행, 오락, 여행, 구매 등 체험성 항목을 풍부하게 하고 2차 소비를 촉진하여 관광지 영업에서 입장권의 비중을 점차 낮추도록 한다. 동시에 지방정부도 관광지의 건강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을 잘해야 하며 지방 관광산업이 입장료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의 업그레이드를 촉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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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보석가격의 인상폭이 황금보다 더 높아, 어떤 사람은 1년 사이에 40만 위안 벌어올해 구정 때 샤오치는 무게가0.5캐럿의 루비를사서 팔찌로 맞춤제작했는데가격이 7,000위안에 가까웠다. 착용한지 2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가게 사장이 샤오치에게 연락해 1만 위안에 회수하겠다고 말했다."제가 좋아하기때문에 팔기 아까웠다. 하지만 가격이 이렇게 빨리 오를 줄은 몰랐다'며 반년 동안 샤오치는 가게 사장이 위챗 모멘트에서 올린 제품 가격이 계속 인상되는 추세였고 지금은 이미 1만 위안 이하의 상품이 없었다. 샤오치는 자신의 30세 선물로 1캐럿 정도의 루비로 펜던트를 만들려고 했지만 온·오프라인에서 여러 가게에 물어봤더니 예산을 훨씬 초과하였다. 그녀는 "품질이 조금 좋은 것은 2만 정도, 더 좋은 거는 5만-6만 원인데 반년 전보다 값이 너무 많이 올라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말했다. 컬러 보석를 전문 취급하는 전자상거래 담당자는 "최근 2년 동안 컬러 보석 원재료는 계속 가격이 오르고 있다. 올해 들어 가격 인상이 더욱 뚜렷하며 특히 고품질의 원재료는 가격이 두 배나 올랐다"며 "예를 들어 1.5캐럿짜리 루비는 올해 상반기에 7만 위안이며 하반기에 들어서 11만원이다. 사파이어도 2캐럿 이상이면 두 배 정도 올랐다'며 설명했다.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보석 담당자는 "올해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아쿠아 사파이어 등 컬러 보석 원재료의 가격이 보편적으로 30%~50% 올랐고, 고품질의 원료도 두 배 올랐다"며 "사파이어 같은 경우 원재료가 특히 부족해 가격이 많이 올랐다'며 전했다. 천모는 그가 보석을 사는 것은 주로 투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그는 60만 원이 넘는 11캐럿짜리 사파이어를 자산으로 보유했다. 금년에 이와 같은 품질의 사파이어 시장가는 이미 100만 위안을 웃돌았는데, 이는 곧 일년도 안되어 40만 위안의 가치가 올랐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한다. 미래 추세를 전망하며 호자문(胡子文-절강 보석, 옥석 액세서리 협회 부회장 겸 비서장)은 '현재 보석과 옥석 판매는 매우 다원적이고 개성화되어 있으며, 컬러 보석은 이러한 요구와 표현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여전히 상승 추세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고급 컬러 보석(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특히 큰 입자의 고급 컬러 보석은 일정한 수집과 가치 유지 기능이 있어 희소성이 높으며, 황금과 비교한다면 이러한 보석은 여전히 상승할 공간이 있다. 올해 들어 보석 외에 진주 액세서리의 판매도 활발하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CCTV 재경 보도에 따르면, 심천수이베이(水贝)시장은 중국 황금 보석 소비의 “청우계”(晴雨表)이며, 그중 진주 무역과 상감 가공(镶嵌加工)은 중국내 약 절반 정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한다. 광동 심천수이베이시장 진주 도매상 진연은 '작년부터 담수 진주(淡水珍珠)의 가격이 완만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특히 가격 인상이 선명한데 일반 진주는 30~50% 올랐고, 가장 인기많은 진주는 80%가량 올랐다. 가격이 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물건이 없다'며 소개했다. 업계인사는 '진주는 일종의 유기보석으로 재생 가능한 자원에 속하므로 소비자가 진주를 살 때는 이성적으로 소비해야 한다'며 제안하였다. 보석과 진주의 호황에 비해 다이아몬드 가격은 올해 들어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세계 반제품다이아몬드 가격지수에 따르면 올해 들어 다이아몬드 가격은 6.5% 하락했으며 2022년 2월의 역사적 고점보다 18% 하락했다. CNBC에 따르면 평균보다 품질이 조금 높은 1캐럿짜리 천연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1년 전에는 6,700달러였지만 지금은 5,300달러에 팔리고 있다. 2020년, 인공 다이아몬드의 시장 판매 점유율은 2.4%에 불과하다. 올해는 9.3퍼센트가 되었다. 세계 다이아몬드 가격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반면 다이아몬드에 열광했던 많은 젊은 소비자들이 지금은 금을 더 선호한다. 다이아몬드의 가치 보유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도 다이아몬드를 사는 것이 금을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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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49세 가이드 열사병으로 사망, 외출할 때 더위 조심해야7월 3일, 온라인에서 “베이징 한 가이드가 여행단체를 데리고 유람하는 도중 더위를 먹어 사망하였다”고 전하였다. 여러 모로 확인한 결과 사건은 7월 2일에 발생하였고 가이드의 성은 공씨며 나이는49세이다. 가이드공씨는 연학단(研学团)을 이끌고 이화원에서 일정을 마치고 버스 안에서 쓰러져 병원에 이송되어 응급처치를받았으나 숨졌다고 한다. 병원 증명에 따르면 공씨는 열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공씨의 동료는 '공씨는 원래 연학단을 이끌고 이화원에 들어간 지 1시간 후에 이미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학생들을 이화원 밖의 버스에 태웠다'고 말했다. 현재 공씨의 동료들은 여전히 여행사와 공씨의 사후처리를 소통하고 있다. 7월 2일, 베이징 기상청 공지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경 베이징시 대부분 지역의 기온은 35~36℃였다. 7월 3일, 류모는 '49세의 공씨는 외아들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생전에 매우 밝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그가 사망한 후 생전 친구들이 후사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공씨의 아버지는 올해 80세이고 평소에 혼자 살고 있다. 공씨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현재 양로원에 있다. 류모는 '평소에 어머니를 보러 양로원에 갈 때 모두 공씨가 차를 몰고 아버지를모시고 함께 갔는데 공씨의 아버지는 나중에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양로원에 가서 아내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매우 괴로웠다'고 말했다. 6월 16일 북경의 한 중년 여성이 혼수상태로 병원에 실려갔다. 당시 여성의 체온은 섭씨 42도를 웃돌아 열사병 진단을 받았다. 그후 7시간 가까이 응급치료를 받다가 17일 새벽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성이 야외에서 아이를 데리고 활동하다가 귀가한 후 열사병 증세를 보였으나 그녀는 제때에 조치를 취하지 않아 비극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열사병은 일사병, 가벼운 열사병, 중증 열사병, 심각한 열사병 4단계로 나뉜다. 일사병과 가장 심각한 열사병 사이에는 진행 과정이 있다. 만약 제때에 조치를 취한다면 대부분의 환자는 열사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베이징대학 인민병원 응급의학과 부주임 의사 지빙(迟骋)은 '일사병은 주로 현기증, 무기력, 땀, 갈증, 주의력 결핍으로 나타난다. 이후 체온이 올라가고 열이 나지만 의식전환이 없어 가벼운 열사병 단계에 접어든다. 만약 그대로 놔두면 체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섭씨 40~42도의 고열에 이르고 사지경련, 의식장애를 동반한 중증 열사병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열사병은 여러 장기 부전이 합병되어 사망률이 매우 높다'며 소개하였다. 물리적으로 온도를 낮추고 실내 온도를 낮추고 수분을 보충하면 환자의 열사병 진행을 완화시킬 수 있다. 만약 환자의 체온이 상승하거나 사지경련 혹은 졸음, 인지장애 등 의식변화가 나타나면 즉시 병원으로 가 구급치료를 받아야 한다. 고온, 고습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학습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의해서 휴식해야 한다. 30분마다 5~10분 정도 그늘에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제때에 수분을 보충하고 녹두국, 냉차 등은 더위를 식히는 음료이다. 야외활동은반드시가장더운오후시간대를피하고하루중비교적서늘한이른아침이나저녁야외활동을선택할수있으며격렬한운동을피하며열이쌓여체온이올라가는것을방지하기위해짙은색옷을입지않는것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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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침대열차(高级动卧), 일반 티켓가격의 70배! 8분 운행 요금이 420위안최근, 강소 누리꾼은 ‘고속열차 D2245를 탑승해 남경남역에서 강닝역(江宁站)까지 8분동안 앉았는데 열차침대 판매가가 420위안이다. 일반 티켓(二等票价)의 70배나 된다’며 비싼 가격에 불만을 토로했다.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신발을 벗고 이불을 덮자마자 다음 역에 도착했겠다’, ‘기본요금이 있는게 아닌가?’, ‘식사 포함인지? 시설은 어떤지?’하는 댓글들을 남겼다. 12306 홈페이지에 따르면 D2245열차는 남경남역에서 강닝역까지 8분동안 달리며 일반 티켓가격은 6위안, 고급 침대가격은 420위안이였다. 상기 열차는 중경 북역에서 출발하여 항저우 동역까지 운행하며 남경남역의 다음 역은 강닝역이며 리수이(溧水), 리양(溧阳), 후저우(湖州)를 지나 항저우 동역에 도착한다. 그중 강닝부터 리수이까지 침대가격은 420위안(운행시간: 13분), 리양부터 후저우까지 420위안(운행시간: 25분), 그리고 남경 남역에서 항저우 동역(운행시간: 90분)까지의 침대가격은 여전히 420위안이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남경남역의 담당직원은‘그럴리가 없다. 한개역만 탑승한 가격이 400여 위안? 12306공식홈페이지의 정보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며 말하였다. 12306고객서비스센터는 ‘티켓가격은 철로국에서 통일로 정한 것이며 고급 침대의 시설이 비교적 완비되어 가격이 비싼 편이다. 조회에 따르면 남경 남역부터 강닝역까지 고급 침대는 420위안이 맞으며 방에 위아래 침대가 있으며 아래 침대의 가격이 조금 더 비싸다. 구체적인 시설과 식사가 나오는지 등 사항은 열차 내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며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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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학교, ‘985대학에 합격하면 30만 위안 주겠다’는 약속 지키지 않아 신고당해호북 스옌모고등학교(十堰)는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2019년 4월에 학교 공식계정에 ‘가오카오(高考)에서 985, 211 쌍 1류 대학에 입학한 학생에게 5~30만 위안 장려급을 지급한다’고 공지하였다. 2022년 6월, 상기 고등학교에 다니던 왕모는 985대학에 합격하였고 학교측에서 장려금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받지 못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법원은 ‘계약은 민사주체 사이에서 성립, 변경, 종료되는 민사법률관계의 협의이다. 학교측에서 학생모집공고를 발표한 것은 타인과 계약을 정립하다는 의미가 있으며 왕모가 학교에 합격된 것은 쌍방계약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인정하였다. 왕모가 985대학에 입학되었고 상기 고등학교의 학생모집공고에 따라 왕모는 학교에서 약정한 장려대상에 부합되며 학교측에 장려금 지급요구에 법원측은 지지를 하는 태도였다. 장려금 금액에 대해 법원은 학생모집공고에 학생에 대해 장려금 증여행위를 진행한다고 약속하였지만 학생이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외에 학교와 선생님들의 교육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학교측에서 왕모에게 5만 위안을 지급하도록 판결하였다. 누리꾼들은 학교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행위에 대해 ‘할 수 없으면 약속을 하지 말 것이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신용을 지키지 않는 학교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였다’, ‘가장 중요한 수업-성실(诚信)을 배워주지 않았다’며 댓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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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중국공산당으로 전향1927년 4월, ‘청당(淸黨)’정변으로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김훈부부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소련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김훈은 삐스티(毕士悌)로 개명하고 모스크바 중산대에서 1년간 정치이론을 공부하고 모스크바 육군보병학교로 옮겨 다시1년간 군사학을 공부했습니다. 1930년 봄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중앙군사위원회를 향해 무장투쟁을 인솔할 수 있는 조선족 군사간부 한 명을 동만주지역으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김훈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동만주특별위원 겸 군사위원서기로 파견되었습니다. 1926년 5월, 헤이룽장 하얼빈 주허현(珠河縣)에서 성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지역을 동만(東滿), 남만(南滿), 북만(北滿)으로 분류해서 관할했습니다. 둥만은 옌지(延吉), 훈춘(琿春), 허룽(和龍), 왕칭(汪淸), 둔화(敦化), 안투(安圖), 창바이(長白) 등 이며, 남만은 지린(吉林), 단둥(丹東) 일대, 하얼빈(哈爾濱) 이북, 중동 철도노선 일대를 칭하며 쑹화(松花)강 하류의 광범위한 지역을 북만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무렵 소련이“일국일당”원칙을 발표했는데, 한 나라에 한 개 당 원칙을 지키야 함으로 중국에는 중국공산당 활동만 허용되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은 해산해야 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1928년 8월경 중공동만구위원회 산하 10개 지부 조선공산당원이 탈퇴하여 22명만 남았습니다. 1930년 3월 조선공산당 ML파도 조선공산당만주총국 해체를 선언하고 이어 다른 파벌 공산당도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동북지방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거의 해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해산된 조선공산당원들을 중국공산당으로 결집해야 했습니다. 김훈은 옌지현 무산(茂山)촌에 와서 간부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만주당위원회의 결정과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부인 이추악과 지역을 순회하며 활동한 결과, 1930년 8~10월 사이 옌지, 왕칭, 롱징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은 모두 670명인데 그 중 전체 98.5%를 차지하는660명이 한인이었습니다. 그 해10월부터 김훈은 이들을 기반으로 동만특별위원회를 조직했는데1931년 2월까지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산하에 6개 현위원회, 19개 구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김훈은 하얼빈 중공동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 주요임무는 인민대중을 무장시켜 항일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는 무장 대오를 건립하는 일입니다. 지린 판스(盤石)현에 정치군사간부 훈련반을 조직하고 한족과 조선족 군중들을 규합하여 대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좀 무서운 일을 했습니다. 1932년 4월, 반일 농민봉기를 일으켜 친일파 50여명을 숙청하고 일제가 건설한 철도를 파괴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판스에는 이동광((1904~1937), 이홍광(1910~1935)이 친일배를 처벌하는‘개잡이부대’가 있었습니다. 김훈은 ‘개잡이부대’를 토대로 청년들을 흡수하여 반석노농의용군이라는 남만유격대를 설립했습니다. 1932년 5월 7일, 하마하자(河马河子)에서 조선족과 한족 800~900여명과 항일무장 시위를 전개하고 나흘동안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친일배 40여명을 처단했습니다. 김훈은 동만주에서 기존의 돌격대, 권총대, 장총대 등 360여명을 모아 동만항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김훈의 지휘를 받은 옌지현과 허롱현 일대의 농민들은 공산당과 협력하여 친일주구파와 지주들로부터 소작계약서와 고리대금 문서를 빼앗아 소각하고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곳곳에 농민협회가 세워지고 농민자위대도 조직되었습니다. 남만에 항일유격대가 창건되자 한인들은 1930년 5월27일 자신들만의 활동기지 야오수이동(藥水洞)소비에트를 건립했습니다. 대중기반이 좋고 일제 통치기관과 멀리 떨어진 산간마을 샤오왕칭(小汪清), 다황거우(大荒溝)에 소비에트는 조선인 항일유격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근거지내의 인구는 약 2만여명이며 그 중 90%가 조선인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지역에서 토지의 주인이 된 농민들은 유격대원과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도우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소비에트정부에서 반포한 “소학교의무교육법”에 따라 대중들이 자체적으로 학교를 마련하고 시사정치 및 혁명투쟁 사상과 군사지식도 가르쳤습니다. 항일유격근거지에는 착취제도와 억압이 없는 사회, 인민대중이 참다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조성한다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혁명을 실시했습니다. 16세 이상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여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인 권리도 부여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밑이나 움막을 교실로 삼아 공부를 하며 유격대를 도와 곤봉을 쥐고 보초를 서고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근거지내에 농민협회, 반일회, 부녀회 등 대중단체가 적위대, 농민자위대, 청년의용군 등 무장단체들이 항일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깊은 산속에 무기수리소를 마련하여 작탄을 제조하고 부녀들은 의복을 만들어 유격대를 지원했습니다. 김훈은 “추수투쟁”, “춘황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31년 9월, 추수때를 기해 옌지현 농민 800여명은 각 농촌마을을 행진하며 “제국주의 타도”와“소작료 인하”등을 외치며 행진을 했습니다. 지주들로부터 양식을 빌려야 하는 춘궁기에 “양식 탈취” 투쟁을 전개했지요. 1932년 2월, 옌지현 이란구(義蘭區) 일대에서는 농민들이 일본경찰서를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탈취해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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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윈난 강무학당에서 훈련받은 직업군인아무래도 계속 군사활동을 하려면 군사학교에 입교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1921년 5월, 김훈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 16기 포병과에 입교했습니다. 청산리 전쟁을 치른 그 다음 해입니다. 윈난강무당에서도 김훈은 제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지를 단련했습니다. 산악시간에 벽돌 20장을 담은 배낭을 매고 등산 경기를 하는데 김훈이 매번 일등하여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 1924년 전교 수석으로 윈난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윈난강무당 학교측에서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김훈은 혁명의 도시 광저우로 왔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서는 양림(楊林)이란 이름으로 학생총대 기술조교로 취임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직업교관입니다.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저우은라이(周恩來, 1898~1976)가 김훈을 주목했습니다. 1925년 2월, 동정전쟁에서 김훈은 황포군관학교 3기 학생대 제4대대 학생군 200명을 인솔해서 1~2차 동정전쟁에 참전했는데 전쟁터에서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김훈의 모습은 교관들과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저우은라이가 김훈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2차 동정전쟁 후 김훈은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진하고 저우은라이가 지도하는 혁명청년연합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말, 평양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여자친구 이추악(1901~1936)도 평양에서 일본 군경의 수배를 피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이들은 결혼하고, 이추악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의 동정선전총대에서 선전원으로 일했습니다. 김훈은 예팅독립단 3 연대의 500명을 통솔하는 연대장에 임명 되었습니다. 국공합작기간이지만 중국공산당은 자신들만의 군대가 없었습니다. 혁명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공산당은 1925년 11월 광둥성 가오야오현(高要縣,현재의 자오칭(肇慶)에서 약 2천여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4군독립단을 조직했습니다. 예팅(叶挺, 1896~1946)이 단장을 맡아서 예팅독립단(叶挺獨立團) 이라고도 합니다. 예팅독립단은 명목상으로는 제4군에 예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 광둥지구위원회가 직접 간부를 임명하고 인사이동을 시키는 공산당 군대였습니다. 전체 단원 중 85%가 공산당원이나 공산주의 청년단원인데 한인들도 150여명 있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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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가장 무더운 한 해? 올해 상반년 고온일 새로운 기록 돌파최근, 중국기상국은 ‘올해 상반년 고온일은 1961년 이래 같은 시기보다 더욱 많다. 7~8월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화북, 화중 중부와 남부, 서남지역 동북부 등 지역에 계단성으로 고온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며 발표하였다. 올해 상반년 중국의 평균 고온일(일 최고기온 ≥35℃)은 4.1일이며 같은 시기(2.2일)보다 1.9일이 많으며 1961년 이래 가장 많은 한 해이다. 같은 시기와 비교했을 때 화북 동부, 화동 북부, 하남 서부, 서남지역 남부 및 신강 남부, 내몽고 서부 등 지역은 5~10일 많으며 일부 지역은 10일 이상이 된다. 올해 상반년 이래 중국은 4차례 지역성 고온과정을 거쳤으며 각 5월 28일부터 6월 5일, 6월 6일~12일, 6월 14일~6월 17일, 6월 21일~30일이다. 광동은 롱저우수(龙舟水)가 잠시 멈추고 부고기압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태풍 마와(玛娃) 하천기류 등 영상으로 5월 하순부터 고온날씨가 지속되었다. 중국기상청은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중국은 올해 처음으로 구역성 고온날씨가 나타났으며 다른 해보다 16일이나 이르며 상해, 운남, 사천, 안휘, 광동 등 15개 성시(省市)에 영향주었다. 하북지역의 고온 극단성이 강해 북경 탕허구(汤河口 41.8℃), 천진 대항(大港 41.8℃) 등 22개 관측소의 수치가 역사 극한치를 초과했으며 124개 국가 관측소에서 40℃이상을 기록하였다.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북경 남교관측소는 연속 3일 동안 기온이 40℃ 이상이였으며 고온시간이 40시간 이상을 지속하였고 6월 22일의 최고기온은 41.1℃에 달하였다. 중국기상청은 7월 상반기 화북동부와 황화이북부(黄淮北部) 등 지역은 여전히 고온날씨가 지속되며 5일~8일에 화북, 황화이에 지속적인 고온날씨가 나타나며 6일~9일은 강남 동부, 화남 동부에 고온날씨가 나타날 것으며 예측하였고 7월, 8월에 중국 화북, 화중 중부와 남부, 서남지역 동북부 등 지역의 기온은 다른 해보다 1~2℃ 높고 계단성 고온날씨가 나타날 것이다고 예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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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속에서 줄을 서 800위안 책을 사는 이유가 LV로고가 세겨져 있는 캔버스 가방을 가지기 위해?!여름의 무더위에 상하이 거리에 또 줄을 서는 성황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명품 브랜드가 세 개의 카페와 협업해 진행하는 “일시적 서점”(限时书店)행사이다. 6월 27일 오후, 상하이 영가로, 무강로, 봉현로 세 곳의 "일시적 서점" 앞에 소비자들은 "재미있다"," 사진 찍기 위한 것이다", "책은 비싸지만 캔버스 가방은 가장 싼 아이템이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다" "어이없다"라는 반응도 보였다. 6월 27일 13시경, 영가로 메탈핸즈 카페의 "일시적 서점" 입구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직원이 소비자들에게 권당 290위안의 도시 안내서가 매진되었고, 현장에서 더 비싼 도서만 살 수 있다고 알렸다. 이것은 캔버스 백 하나에 최소 780원이 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가로에 있는 "일시적 서점"은 입구에 있는 빨간색 차일(遮阳篷)이 각벽히 눈에 띄였는데 당시 가게 입구에 30~40명이 약 20~30미터의 긴 줄을 서고 있었다. 긴 대기 시간 때문에 몇몇 여성들은 양산을 쓰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기다렸다. 봉현로, 무강로의 매장 상황은 영가로점과 비슷했다. 봉현로 300번지에 있는 초록색 가게의 간판아래에는 예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 많이 서 있었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 커피를 사는 사람, 줄을 서 책을 사는 사람도 있고 블로거들이 영상을 찍기도 했다. 관계자는 "책을 사려는 사람은 위챗 미니프로그램을 이용해 명품브랜드 계정을 등록해야 입장할 수 있다"며" 오전에 가게를 열고 저녁 7시 30분까지 문을 닫을 때까지 줄곧 줄을 서는 사람이 있다. 이틀 동안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무슨 책이 그렇게 비쌀까? 세 곳의 "일시적 서점" 직원의 소개에 따르면, 가게 안에서 가장 싼 도서는 모두 290위안의 "도시 안내서"이며, 예를 들면 베이징 도시안내서, 상하이 도시안내서, 청두 도시안내서, 그리고 국외 도시의 도시 안내서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도시 안내서는 오전 중에 매진되는 경우가 많다. 무강로점의 가장 비싼 앨범은 한 권에 1,200원이고 봉현로점의 가장 비싼 도서는 한 권에 1,190원이다. 봉현로점의 직원은 다양한 가격대의 도서들이 "모두 잘 팔린다"고 말했다. 이번에, 세 곳의 "일시적 서점"은 붉은 색, 초록색, 노란색 세가지 색으로 꾸몄는데, 각각 베이징 도시 안내서, 상하이 도시 안내서, 청두 도시 안내서를 대표하며 내용은 호텔, 식당, 박물관 등 각 도시의 특색을 소개했다. "이 책들은 모두 예술가, 사진작가들을 초대해 창작한 것이다." “일시적 서점” 관계자는 예를 들어 상하이 도시안내서는 작가 진위청(金宇澄)을 게스트 카피라이터로 초대했고 베이징 도시안내서는 피아니스트 랑랑(郎朗)을 게스트 카피라이터로 초대했다며 밝혔다. 하지만 어떤 소비자들은 책에 관심이 없었다. 모 여성은 "정말로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캔버스 가방을 사기 위해서이며 온라인에서 사면 캔버스 가방이 없다"며 말했다. 이번 "일시적 서점" 활동은 6월 25일부터 7월 9일까지 지속되며, 현재 소셜 플랫폼에는 이미 많은 홍보 내용과 네티즌이 게시한 사진, 글이 있다.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이미 구매대행하는 암표상들이 나타났다. 상기 브랜드 캔버스 가방에 대해 인터넷에 730원, 800원, 심지어 1,200원을 초과하는 구매 대행 또는 양도 게시물도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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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서류봉투(档案) 함부로 뜯어도 될까?최근, "엄마가 개인서류봉투를 뜯어 딸이 화가 나 우는"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다. 6월 26일, 사천성 루저우시(四川泸州市)의 한 여학생이 졸업후 개인서류봉투(档案袋)를 집에 가져가 보관하였으며 어머니가 뜯어본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고함쳤다. 엄마 장 여사는 "그때 서류봉투를 개인이 뜯어서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며 “오늘 딸의 정서가 좀 좋아졌고 어제는자신을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관련 기관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처리할 것이며 이미 발생한 일은 잘 해결될 것이다'며 말했다. 사사로이 서류봉투를 뜯으면 서류관리자질을 갖춘기관에 의해 접수가 거부될 수 있으며 상황이 엄중한 경우 신용서류(诚信档案)에 기록되어 향후 연구생시험, 공무원시험 등 중요한 시험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 서류를 전달하면 서비스 요금을 내야 하는가? 2015년 1월 1일부터 인사관계 및 서류보관비, 조회비, 증명비, 서류전달비 등 비용은 모두 취소되었다. 각지 인력자원 공공서비스센터는 졸업생들을 위해 서류전달 등 수속을 하고, 각종 공공취업과 인재서비스를 제공하며 그 어떤 비용도 받지 않는다. 졸업생서류란(毕业生档案)? 졸업생 서류는 학생이 졸업하기 전의 가정상황, 학업성적, 신체상황 등의 문서기재자료이며, 고용 회사에서 졸업생을 선발하고 채용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재학 중에는 학적파일이라 하고, 졸업 후에는 인사파일이라 한다. 서류에는 주로 대학교 졸업생 등록표, 학업성적표, 재학기간의 모든 상벌자료, 입단 입당 지원서, 졸업 전 신체검사표 등의 자료가 있다. 즉 개인경력의 기록이며 인사 관리와 서비스의 근거가 된다. 서류를 버리거나 서류를 분실하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 졸업생은 회사 입사후 인사부서에 자신의 서류가 제때에 도착했는지를 조회해야 한다. 만약 장기간 도착하지 않았다면 즉시 학교에 연락하여 서류 우편번호나 EMS 번호를 조회하고, 서류의 행방을 파악하여 장시간 지연으로 서류가 분실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만약 졸업생 서류를 분실하면 근무연수 인정, 직함심사, 정치 심사 등 처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개인이 서류를 보관할 수 있습니까? 인사부 규정: 유동인원 인사기록은 구체적으로 현급 이상(현급 포함) 공공취업과 인재서비스기관 및 인력자원사회보장부문의 허가를 받은 단위에서 관리한다. 개인 또는 타인의 서류를 보관하는 것을 엄금한다. 만약 개인이 보관하는 경우 최대한 빨리 인사 파일을 호적지 또는 현재 직장소재지의 공공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보관해야 한다. 서류는 왜 사사로이 개봉할 수 없을까? 1. 관련 규정에 따라 개인 서류는 기밀 서류에 속한다. 서류관리 권한을 가진 단위만이 서류를 확인, 검사하고 서류심사 밀봉할 수 있다. 서류보관 권한이 없는 개인이 서류를 개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봉된 서류는 진실성과 완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 2. 서류는 개봉된 후 관련 단위가 접수를 거부하면 서류는 "폐기"서류 또는 "사망”서류로 된다. 파일 재작성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롭다. 3. 파일을 사사로이 뜯은 후 인재시장에 의해 접수가 거절되고 접수가 거절되면 연구생시험, 공무원 시험 등이 영향을 받는다. 서류의 행방은 어떻게 되나요? 1. 만약 취직하였고 직장에 서류관리권한이 있으면 서류를 해당 직장에 발송할수 있다.만약 직장에 서류관리 권한이 없다면 직장소재지 인력자원시장에 위탁하여 관리할수 있다. 또는 출생지역의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국에 보내 관리할 수도 있다. 2. 만약 잠시 직업이 없고, 취업 대기 중일 경우, 서류는 대학교가 "우정EMS 표준택배" 형식을 통해 출생지역의 공공 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전달할 수 있다. 3. 만약 계속 연구생 시험에 응시한다면 서류는 출생지역의 공공 취업 및 인재 서비스 기관에 보낼 수 있다. 만약 연구생 시험에 합격하면 즉시 서류를 입학하게 될 학교에 보내 학적서류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