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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일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를 먼저 떠나 광주에 도착한 후 이전부터 중국군계통에 복직하던 이준식, 채원개 양인의 주선으로 동산(東山)의 백원(柏園)은 임시정부 청사, 아세아여관은 전부 대가족을 수용케 되었으니……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이준식, 채원개 장군은 누구일까요? 먼저 채원개 장군(蔡元凱, 1895-1974)장군을 소개하겠습니다.
채원개는 1919년 고향은 평안남도 영원입니다. 고향에서 친구들과 삼일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고 탈옥해서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가지 27년간을 독립군에 종사하고 1946년 귀국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28년을 살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원개 장군에게는 이승만을 탄핵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집정하다가 1960년 정권에서 물러났으니 14년간을 자신이 탄핵한 대통령 치하에서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의 독립운동의 공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죠. 한 때 사단장이었지만 국가보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한 달 5백원 월세집에 막내 손자가 육군피복창에 근무하여 벌어오는 적은 수입으로 가족 4명이 살았습니다.
1963년 제18회 광복절을 기해 새정권이 채원개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려고 했습니다만, 채원개는 유관부서의 통보를 받고 “광복운동에 참가한 것은 후일의 공명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맡겨진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극구 표창받기를 사양했습니다. 이미 68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채원개는 내각사무처장에게 편지를 보내 “광복군 출신유공자 명단에 포함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맡겨진 의무”의 일부를 다했을 뿐이니 이를 다른 유공자에게 돌려주기 바란다”고 대통령 표창수여를 거부하고 과분한 표창장을 반환하고 나니 몸이 가쁜하다고 말했습니다.
1968년에서야 건국국민 훈장을 받았습니다. 기자가 채원개가 살고 있는 부천군 신앙촌을 찾아 갔을 때, 그는 단칸방에 누워 앓고 있었는데, 24세의 막내 아들이 한전 검침원으로 벌어오는 월수입 5천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채원개는 기자에게 “다 죽게 된 늙은이에게 훈장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자식들에게 직장을 주어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무렵 건국훈장 수여자 본인은 매월 연금 5천원, 가족수당 1천원(1인당), 간호수당 2천원, 생계수당 2천원씩을 받을 때였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