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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3) 직봉전쟁에서 대부대 견학과 실전

기사입력 2023.03.0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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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겨울 채원개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대표로 선임되어 국민대표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대한통의부는 청산리 전쟁과 경신참변을 겪은 후 통합된 만주의 무장 항일 단체입니다. 총장에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을 선임하고, 산하에 민사부, 교섭부, 군사부, 법무부, 재무부, 학무부, 실업부, 교통부, 참모부 등 10개 부서를 설치하였으니 준국가적인 군정부 조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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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내부 분열과 재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안창호가 주도하여 “체계있는 이론의 실천과 통일된 영도기구”를 만들기 위해 개최한 회의였습니다. 미주, 상하이, 만주, 러시아 등 지역에서 120여 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회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 의장은 통의부의 김동삼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의제는 “임시정부의 문제점을 개조하여 계속 존속시키느냐?” 아니면 “이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는냐?”하는 창조파와 개조파의 주장으로 갈라졌습니다. 창조파와 개조파가 심각하게 대립하자 김동삼을 비롯한 재만 독립군 대표들은 대표 사면 청원서를 제출하고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채원개는 노병회의 추천을 받아 최천호(崔天浩1900~1989), 박희곤 등과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강무학교에 입교했습니다. 임정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김구와 여운형 등이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노병회를 조직했습니다. 노병회는 조국 광복을 위해 향후 10년 이내에 만 명 이상의 병력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하며, 군인과 전비가 목표에 도달했을 때, 이사회의 제의와 총회의 결의로써 독립전쟁을 개시하려고 했습니다. 


    자체적인 군사학교가 없는지라 노병들은 중국의 군사기관에 파견해서 교육을 받았는데 채원개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강무학당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상하이에서 륜선(輪船)을 타고 장강(長江)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커우(漢口)에 이른 다음, 베이징과 한커우를 잇는 경한선(京漢線)을 타고 정저우(鄭州)에 이르러, 다시 롱하이선(隴海線, 隴山(陝西省과 甘肅省 경계에 위치한 산)-海州(중국 동해안) 철도를 이용하여 허난성 뤄양강무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중국군 제3사단 교관으로 복무 중이던 김유신(金有信, 1916~1943)과 바오딩(保定)강무학교를 졸업한 조윤식(趙潤植, 조송평, 1894~1950)이 채원개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이들의 안내로 채원개는 북양군벌의 총수 우페이푸(吴佩孚, 1874~1939)를 만났습니다. 한중 양국은 순치(脣齒) 관계이며 적극적으로 분투하라는 우페이푸의 격려를 받고 채원개는 기병과에 입교했습니다. 그 무렵, 뤄양강무학당에 한인 입교생이 50명여명 재학하고 유년 과정에도 30명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뤄양강무학당에 재학 중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서 채원개는 직군(直軍)의 일원으로 참전했습니다. 직봉전쟁은 영국과 미국 세력을 대변하던 직계(直系) 군벌 차오쿤(曹錕, 1862~1938)과 우페이푸, 일본의 지지를 받던 봉계(奉系) 군벌 장줘린(張作霖, 1875~1928)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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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페이푸 장군, 출처 바이두

     

    제2차 직봉전쟁은 1924년 9월 15일부터 10월 23일까지 직계와 봉계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1924년 9월 15일, 장줘린이 15만 군대를 이끌고 츠펑(赤峰), 네이멍구(內蒙古), 청더(承德) 3개 지역으로 진공해 왔고, 우페이푸는 20만 군대를 조직해서 응전했으나 주력부대는 거의 전멸했습니다. 


    2차 직봉전쟁 때 채원개는 직계 우페이푸 군대 총사령부에서 전령(傳令)으로 산하이관과 친황도(秦皇島) 일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채원개는 “대부대 작전 참여가 처음이었으며 모든 것이 나의 견학이요, 실습이었다. 실로 얻은 바가 컸었다”고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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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계 우페이푸 군사 진군 장면, 출처, 『軍閥之圖』

     

     

    1924년 9월, 우페이푸의 패전으로 채원개는 톈진을 경유해서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 경과를 보고하고 독립신문사에 잠시 머물다가 시아이한스로(西愛咸斯路)에서 김동명(金東明) 등과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참고 자료

    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2 92권,『민족운동연감』, 국사편찬위원회, 2009년 11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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