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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봄, 채원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 군무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참의부가 조직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만주 대한통의부내에서는 복벽주의파와 공화주의파가 적대관계로 대립하여 분열되었습니다.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을 비롯한 공화계 인사들이 대한통의부의 많은 요직을 차지하고 복벽주의 대표인 전덕원(全德元, 1877~1943)에게는 권력 없는 참모부 부감이라는 직책이 주어진데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습니다.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파 인사들은 1923년 2월 ‘의군부’라는 새로운 독립군단을 만들어 대한통의부를 이탈했습니다. 전덕원 계열이 이탈하고 또 일부 세력이 지도층의 노선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 휘하의 독립군 병사들이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1885~1923)를 살해하고 양기탁을 비롯한 공화계 주요 간부들을 포박하여 구타하는 참혹한 동족상잔이 발생했습니다.
통의부와 의군부가 무력 충돌을 불사하면서 상대를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1924, 백광운)을 비롯한 박응백, 김원상 등이 1923년말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전력하겠으니 임시정부가 구심점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이를 수락하고 통의부 군사 활동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의용군 1.2.3.5 중대가 이탈해 나가 육군주만주참의부를 결성했습니다. 1925년 8월, 통허현(通河縣)에서 임시정부 산하의 ‘육군주만주참의부’를 결성하고 채원개가 임시정부의 군무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육군주만주참의부가 성립된 것은 동족 간의 갈등을 피하고 광복전선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도였으나 역효과도 있었습니다. 통의부 간부들은 남만주 군단이 임시정부에 복종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참의부를 질시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음력 7월 2일 밤, 참의부 제5중대를 공격했습니다. 참의부 대장 김명봉(金鳴鳳, ?~1924) 외 1명이 암살당하고 무기도 강탈당했습니다. 또 암살단을 사방으로 보내 중앙부의 참모장 채찬을 사살했습니다. 압록강변에서는 조선에 가서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만주로 돌아오는 참의부 일행 5명을 사살하고 무기 및 군자금 3만 원도 탈취했습니다.
이후 통합운동이 재개되어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결성되어 1920년대 만주 지방의 실질적인 정부 역활을 합니다. 만주의 민중들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중 어느 부에나 소속된 인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부민 확보를 위해 싸워야 할 적은 그냥 두고 동족끼리 대혈투를 치르는 상황이 발생하자 혁명지사뿐 아니라 일반 민중중에도 독립운동 자체에 환멸을 느끼는 자들이 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 이유필(李裕弼, 1885~1945)이 유혈 충돌 조정 임무를 띤 임정 대표 자격으로 만주 지역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이유필 씨는 비서 채원개 씨를 데리고 지난 5월 2일경 흥경현 하남(河南)에서 일박하고, 길림성 반석현(盤石縣) 반석으로 향하였는데, 그 임무는 당지에 있는 정의부와 중동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 있는 신민부 사이에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바, 본시 정의부는 산업중심주의(産業中心主義)요, 신민부는 군사중심주의(軍事中心주의)이므로, 두 단체가 늘 충돌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우려하던 임시정부에서는 오는 7월 10일에 개최할 독립당 대회에 □만한 집합을 만들기 위하여 그와 같이 분주히 조정에 노력한다고 한다”.
채원개는 각 부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한인사회를 순방하며 통의부와 참의부 두 단체의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년, 134-135쪽. 「정의, 신민의 갈등과내무 총장의 조정, 독립단 대회의 원만을 도모」, 『시대일보』, 1925년 6월 4일.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