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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머문 6개월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辦公處라고 사무실은 두었지만 재정도 열악하고 중국정부의 지원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류저우에서 임시정부는 재충전하여 새로운 항일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류훠공원에서 중국 항전단체들의 활동과 공연을 구경하던 한인 청년들은 자각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대로 앉아서 남의 항전을 구경만 하겠는가?', '우리도 공작대를 결성하여 항전 대열을 만들자.' 임시정부 원로들과 청년들은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항일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1939년 2월, 한국청년들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했습니다. 대원은 34명으로 대부분이 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 또는 자녀였습니다.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한 김동수, 중국중앙군관학교를 나온 지달수, 김인과 같은 군사간부가 있는가 하면 지복영, 신순호 등 여성대원도 11명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10대 소녀부터 30대 주부까지 대부분 임시정부 요인의 부인 또는 딸이었습니다.
청소년과 나이어린 어린이까지 모두 70여명이 망라되었습니다. 동북지역에서 의용군 전투에 참가하고 항전 경험이 있는 고운기를 대장으로 뽑았는데 고운기는 언행이 단정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일단 발언을 하면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선전조ˑ연극조ˑ가무조ˑ아동부로 나누었습니다. 빠듯한 경비지만 임시정부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통일된 복장도 마련했습니다. 청색으로 된 미군식 군복에 배 모양의 모자, 가슴에는 원형 리번을 단 단체복입니다. 지달수, 지복영 등 지청천 장군의 네 형제 자매는 모두 청년공작대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구체적인 활동은 임시정부의 연세드신 요원들이 기획하고 젊은이들이 방법을 찾았는데 젊은이들은 주로 류훠공원에 모여 어떻게 업무를 진행할지 토론하고 연구했습니다.
신문에 전선에서 부상당한 수십 명 부상자들이 류저우 군병원에 입원해 있지만 약품이 부족하고 간호할 손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류저우정부는 “부상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군중을 동원하자”는 정책을 세우고 연일 신문에 기사를 냈습니다. 국민당 제4전구 사령부 군인들이 군병원에 가서 부상병들을 위해 옷을 기워주고 편지도 대필하고 대화를 나누고 혁명 노래를 부르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실례도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 두 명이 류저우 문화구국협회(文化救國協會)의 책임자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협조 내용은 중국인 부상병을 위로하기 위해 모금공연을 할터인데 첫 째는 공연장소를 찾아주고, 둘째는 협연할 중국공연단체를 소개해 줄 것, 셋째는 신문사에 부탁해서 공연기간을 특집으로 보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