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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응호는 고향인 함경남도 덕원군(德原郡) 적전면(赤田面) 신풍리(新豊里)에서 소학교와 중학을 졸업했습니다. 이어 원산(元山) 공립보통학교와 원산 보광(保光)학교 고등과도 졸업했습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응호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자형과 누나가 있는 간도(間島) 롱징(龍井) 쥐즈가(局子街, 현재의 옌볜)로 건너갔습니다. 누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장사를 하고 자형은 롱징의 푸차오 신한촌(浦潮 新韓村) 일본 헌병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서응호는 롱징에서 여인숙을 경영하기도 하고, 일본 영사관의 통역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며 모종의 운동을 계획하다가 다시 원산으로 돌아와 덕성학교(德成學校)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취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해서 전분 회사, 협동운송부 등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다가 1919년, 롱징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창제(昌濟)병원에 통역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창제병원에 근무하면서 서응호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나가 유학경비로 매월 40원씩 보조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업이 실패해서 약속한 학비 지원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낙담해 있던 중 중국 상하이는 학비가 적어도 공부할 수 있고 또 미국으로 도항하기도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상하이로 가기 위해 창제병원을 사직하고 그간 저축한 돈 80원을 여비로 삼아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921년 3월, 서응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도착했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 여기저기 무위도식하던 중 식당을 운영하는 선우혁(鮮于赫, 1883~1985)의 부인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인성학교 교사 합숙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서응호는 8월까지 그 숙소에서 자취하며 전심으로 영어를 독학했습니다.
마침 미국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삼육대학 토목과는 첫 한 학기 학비만 내면 그 후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부모님께 간청했더니 마차를 팔아서 학자금 100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삼육대학에 입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동포가 자기도 고향에서 200원이 곧 송금되는데 돈이 도착하면 갚을 테니 빌어달라고 애걸해서 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포는 고향으로부터 돈을 받고도 갚지 않아 결국 서응호의 삼육대학 입학은 무산되었습니다.

1921년 9월 상순, 학비가 무료인 광둥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여운형(呂運亨, 1885~1947)이 광둥 독군(督軍) 천죵밍(진형명, 陈炯明, 1878~1933)과 중국인 목사 장 모 씨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소개장을 받아 본 장 목사는 현재 쑨원이 광둥성을 진격하는 중이고 천죵밍은 매우 다망하므로 본인의 소개로는 천죵밍을 면회할 가망이 없으니 영남대학 교장 종롱광(锺荣光, 1866~1942)을 통해서 천죵밍 면회를 신청해 보라고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서응호가 장 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종롱광 영남대학 교장을 방문했습니다. 그 무렵, 쑨원은 광시 군벌 루잉팅(陸榮廷, 1859~1928)을 베트남으로 쫒아내고 지속적인 북벌 전쟁을 구상하는 중이었습니다. 종교장은 현재 전쟁 중이라 비행학교는 폐쇄 중임으로 시국이 안정되면 입학하라고 권고해서 비행학교 입학도 무산되었습니다.
서응호가 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한다고 하자 김상훈이 6개월분 학비와 월사금을 지원해 주어서 1922년 3월, 미화(美華)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수료하고 다음 학기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상하이로 갔습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와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신 정유린(鄭有隣) 집에 기거하면서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경영하는 남화(南华)학원에 입학해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남화학원에서도 학비를 낼 수 없어서 1923년 3월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광둥에 있는 김상훈이 자신이 재학 중인 페이잉(培英)학교 교장에게 서응호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더니 교장이 동정하여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광저우로 오라고 연락했습니다. 서응호는 다음 날 상하이를 출발하여 광저우로 왔고, 광저우에 온 지 약 4~5일 후에 페이잉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本町署(본정서)에 檢擧(검거)됐든 의열단사건진상(義烈團事件眞相)」,『동아일보』, 1929년 11월3일. 「서응호 신문조서」(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陳錫祺 主編,『孫中山年譜長篇』下冊, 中華書局, 2003년11월. |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