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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서응호 3 - 의열단 가입

기사입력 2023.06.0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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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잉학교에 재학하던 중 중산대학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으로부터 의열단 재무부장 권준(權晙, 1895~1959)을 소개받았습니다. 권준은 산책하자고 중앙공원으로 서응호를 데리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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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준

     

    권준은 서응호에게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이 있는데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라도 조선 독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없을 테니. 당신도 그것에 가입하여 서로 독립을 위해 노력하자”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서응호는 학업을 목적으로 도항한 자이고 나 같은 학생이 그것에 가입해도 별로 의열단에 이바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권준은 “학생들도 많이 가입해 있다. 또 가입한다 해도 반드시 건물을 파괴하거나 대관을 암살하는 게 아니라 각 사람 나름대로 합당한 활동을 하면 되니 꼭 가입하라”고 간곡하게 권면을 해서 서응호는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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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



    1925년 가을,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원이 약 60여 명이었습니다. 김원봉이 의열단 본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의열단원을 인솔해서 광저우로 왔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 12명이 황푸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고 또 일부 단원 10여 명은 중산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리하여 1926년 말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은 약 100명이 넘었습니다. 

     

    1927년 봄에는 광저우에 집결한 한인은 8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일부 중학생은 열너덧 살밖에 안 되었고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중국의 관내 및 동북 지역, 그리고 소련, 일본 등지에서 중국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광저우를 찾아온 유능한 청년 지사들이었습니다. 한국의 활동적인 젊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거의 광저우에 집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약 250명이 중산 국립대학과 황푸 군관학교에 학적을 두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페이정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산대학교에 입학한 서응호는 실력이 있다고 교민들로부터 꽤 신임을 얻은 편이었습니다. 

     

    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열단은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김원봉은 “종래 의열단은 대관 암살과 건축물 파괴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고 일반의 비판을 듣는 바, 장래에는 단원을 중국 군대에 입대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이들을 남북 만주에 산재해 있는 각 독립단체에 보내어 단원의 군사훈련을 지도 교양하고 조선 내에 밀파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게 한다는 취지를 발표했습니다.

     

    또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얻기 위해 의열단 창립 이래 조선 독립을 위해 단원들이 활동한 실적, 중국혁명군에 입대하여 활동한 공적과 상황을 연혁으로 만들고, 중국혁명의 완성이 조선 혁명운동에 이익이 되는 이유를 서류로 작성하여 중국국민당 광둥성 당부에 제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926년 12월, 제2차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응호는 재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새롭게 구성된 의열단 집행위원들은 의열단의 취지 강령을 선전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연락을 유지할 방법으로 매월 1회 「우리들의 道」란 제목으로 의열단 단보를 발행했습니다.

     

    의열단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지만 의열단 단보 1호를 반지판(半紙版) 8면짜리 150부를 인쇄하여 광둥, 상하이, 한커우 있는 단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2회「의열단보」는 경비가 없어서 3월 중순에 80부를 인쇄해서 배포하고 3회부터는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단원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광저우 상하이, 한커우, 베이징 및 한국과 러시아 내에 지방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내에 소재하는 입오생부에 지방부를 설치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광저우 지방부 책임 간부로서 1927년 4월 중산대학 문과 강당에서 의열단 단원 약 20명을 집합시키고 광저우 지방부 대회를 열었습니다. 광저우 지방부가 조직된 경과를 보고하고, 신입 단원 소개 및 중앙집행위원회 결의 및 논의 사항 등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원 훈련 방법으로서 각자가 항시 혁명 사상 함양에 힘쓰고 이에 관한 서적과 신문 잡지 등의 구독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가끔 토론회를 열어 지식 교환을 할 것을 권했습니다.


     참고자료 

    서응호 공판조서 1939년 11월 29일
    님 웨일즈ˑ김산, 『아리랑』, 동녘, 2011년3월.
    「서응호 신문조서」(제2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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