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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서응호 4 - 중산국립대학 영문과 입학

기사입력 2023.06.1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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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6월, 서응호는 페이잉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경영자인 미국인 부인에게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더니 미국으로 가는 여비만 조달하면 유학 중의 모든 경비는 보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여비를 조달하고, 국내 내연의 처와 결혼을 해약하기 위해 귀국하려고 했으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페이정중학교의 이학현이 서응호에게 인삼을 선물해서 서응호는 인삼을 팔아 여비 40여 원을 마련해 고향으로 갔습니다. 결혼은 해약을 했지만 미국으로 갈 여비는 마련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광둥에서 인삼 행상을 해서 미국유학 경비를 마련하기로 하고 여비 30원가량을 마련해 1926년 9월 하순 원산에서 출발해 10월 10일경 광둥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 중산대학교에서는 “유월 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단체명으로 한인 유학생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고 있었습니다. 광둥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1926년 1월,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중국의 혁명은 식민지ㆍ반식민지 민족, 피압박 민중과 통일전선을 형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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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슈구 원밍로(文明路 215호) 국립 중산대학 구지, 1924년 2월 국립사범학교, 광둥법과대학, 농업전문학교를 합병하여 광둥 국립대학을 설립하고 쑨원 사후 국립 중산대학으로 개명했다.

     

    이런 정책에 의해 국립 중산대학교의 초대 교장 줘루(鄒魯, 1885~1954)는 동방 피압박민족을 지원하라는 국부(國父) 쑨원의 명을 받들어 한국, 베트남 및 대만의 청년을 대량으로 입학시켰습니다. 입학시험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학비를 면제하고 동시에 의복, 서적 등도 제공했는데 국립 중산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이 제일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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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대학 초대 교장 줘루


    유월한국혁명청년회는 장지락(張志樂,金山,1905~1938)이 『아리랑』에 언급한 “조선 혁명 청년연맹”과 동일 단체입니다. “1926년 늦봄에 조선인의 모든 집단과 정파를 대표하는 중앙동맹체인 조선 혁명 청년연맹의 창립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즉석에서 300명의 회원을 얻었다. 이 연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다.” 발기인은 김충창(*金星淑의 이명, 1898~1969)과 김약산(김원봉의 이명, 1898~1958), 장지락이었습니다.


    유월 한국혁명청년회는 광둥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담보해서 학교에 입학시키고 자격을 심사해서 취직도 주선해 주었습니다. 유월한국혁명청년회에 회원에 가입하면 광둥 국립대학교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학비와 식비도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응호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1926년 10월 말 유월 한국혁명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립 중산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국립 중산대학은 1924년 국립광둥대학으로 개교한 이래 1927년 4월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기 전까지 한인 유학생 57명이 재학했습니다. 1925년에 8명이 입학하고, 1926년에 38명이, 1927년에는 4명이 예과에 입학해서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의열단 경비는 늘 부족했습니다. 단원중 수입이 있는 자는 매월 수입의 1/10을 회비로 내고 수입이 없는 자는 10전이었습니다. 광둥에 오면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남북 만주 또는 조선 등지에서 경제적인 준비가 없이 무작정 광저우로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유월 한국혁명청년회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많았는데 광둥성 당부부로부터 학교 입학 지망자들의 이천 위안을 받아 쓰기도 했습니다. 

     

    1927년 4월 한국 독립운동계에 있어서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잘 진행되리라고 믿었던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렬된 것입니다. 중국국민당이 갑자기 공산당원을 속출하여 체포하고 숙청했습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월한국혁명청년회 동지들은 국민당에도, 공산당에도 소속된 자가 많았기 때문에 매우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당은 학살한 공산당원 명단을 발표하고 거리에는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표어가 도처에 붙었습니다. 상황은 급변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광저우는 전쟁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산당 활동에 대한 단속은 한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산대학교 측에서 유월 한국혁명동지회 앞으로 “종래 입학 허가한 조선인은 학력이 불충분하고 입학 후에도 성적이 부진하므로 향후 재학 중 식비를 징수하고 동지회에서 신입 희망자에 대해 먼저 자격시험을 치르게 하라는 요지의 통지를 보내왔습니다.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서 학교측과 몇 차례 교섭을 해서 식비 징수만을 종전대로 무료로 하되 한문, 수학, 영어 3과목은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서 시험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서응호는 중산대학 한인 입학 예비생들의 영어시험을 담당했습니다. 서응호는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 때 의열단 위원직을 사임했습니다. 학생이어서 의열단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1927년 7월 의열단 탈퇴원서를 작성해서 중앙집행위원장 앞으로 제출했는데 중산대학교도 국공 분열 후유증으로 잠시 폐교했습니다. 

     

    서응호는 페이잉학교 미국인 교사로부터 여비를 지원받아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왔습니다.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다가 영국인이 경영하는 버스회사 차표계에 월급 40원을 받고 취직했는데 77세 부친이 병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큰형은 15년 전부터 정신병이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형수가 품팔이로 어렵게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둘째 형도 작년에 죽었습니다. 서응호는 고 귀국하여 집안일을 돕기로 하고 1928년 5월말 경 다니던 버스회사를 사직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참고자료 

    「서응호 신문조서」(제2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鄒魯, 「祝朝鮮復國的回顧」, 『中央日報』(重慶),1945년10월,25일
    님 웨일즈ˑ김산,『아리랑』, 동녘, 2011년3월,
    魏志江,「中山大學과 한국독립운동의 관계」,『한국근현대사연구』2007년 봄호 제40집.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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