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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28일, 상하이를 경유해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에 일본 경찰이 서응호를 수상히 여겨 체포하여 인천 수상경찰서에 구금했습니다. 서응호는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경찰서를 탈출하여 함경도 문평(文坪)으로 와서 일을 했습니다. 석유회사에 근무하기도 하고, 집에서 농사도 지었으나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8월 구직 차 상경했습니다. 경성에서 유월 한국인동지회의 동지 김철호(金哲鎬, 1901~1950)와 윤충식을 만났습니다. 김철호(金哲鎬, 1901~1950)는 1926년 8월, 중산대학 농과대학에 재학 중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7년 10월 의열단으로부터 일제 침략 원흉을 처단하고 주요 건물을 파괴하라는 밀명을 받고 극비에 귀국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전국에 신간회(新刊會)가 설립된 지라 김철호는 표면적으로 고향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해서 총무간사와 서무부 일을 하는 한편 비밀히 의열단 동지를 포섭하고 의열투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윤충식은 1926년 3월 배재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유학을 목적으로 광둥으로 와서 1926년 6월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한 동지입니다. 1928년 2월 조선으로 입국해서 1929년 8월 초순, 중앙청년동맹 본부를 창립하여 지부장이 되고 동지 규합을 하다가 서응호와 재회한 것입니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가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에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과 업적을 알리기 위한 조선박람회 개최 한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서응호와 윤충식, 김철호는 문화여관, 남산여관 등에 전전하여 박람회를 이용하여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주요 기관을 파괴하려고 밀의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피체되었습니다.
먼저 김철호와 윤충식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응호는 한 달 이상을 극비리에 취조를 받았으나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최종 서응호는 유월 한국혁명동지회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단체임을 알면서 이에 가입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여 조선박람회를 방해하려는 수범이라고 판정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참고자료 김철호 공훈록, 국가보훈처 「공판청구서」,『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권,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8월. 「本町署(본정서)에 檢擧(검거)됏던 首犯 徐應湖 活動 顚末, 의열단에 가입」,『동아일보』, 1929년11월3일 |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