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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중화소비에트중앙국 서기이자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부주석인 저우은라이가 김훈을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 수립된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로 불렀습니다. 루이진에서 김훈은 삐스티(毕士悌)란 이름으로 중앙군사위원회 노농홍군 1방면 보충사 노전(老战)위원회 참모직에 임명되었습니다. 노전위원회 임무는 중앙소비에트지구 홍군을 모집해서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일입니다. 김훈은 저우언라이를 도와 병사를 훈련시켜 보충단 10개나 조직했습니다.
1934년 1월, 김훈은 중국공산당 전국 소비에트 2차 대표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이 김훈에게 관심을 가지고 하얼빈에 있는 그의 부인 이추악을 중앙소비에트 구역으로 데려오라고 특별지시를 했습니다만, 그때 국민당 100만 대군이 루이진으로 포위망을 좁혀오는 상황인지라 이추악은 결국 루이진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보다 공산당세력을 뿌리 채 뽑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산당 근거지 루이진을 포위하고 소탕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국민당의 제4차 토벌전쟁 이후 노전위원회는 홍군총사령부, 총정치부, 총참모부를 통합하여 총병참부로 개편했습니다. 김훈은 총병참부 참모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마오저둥은 어쩔 수 없이 국민당의 공격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옌안(延安)을 목적지로 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북쪽을 향해 떠났지요. 모스크바 지도층에서도 중국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지시하여 막연히 장정을 시작했는데 연안까지 이만 오천리 대장정이 되었습니다.

1934년 7월13일, 중국공산당이 루이진을 떠나기 직전 “중국노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김훈도 이에 호응하여 ‘홍군의 북상 항일을 옹호하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국민당은 중국의 절반 이상을 일본에 팔았고 지금 또 중국 전체를 일본 제국주의자에게 팔려고 한다. 망국의 참화가 눈 앞에 펼쳐지고 중국인의 머리에 망국노의 치욕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오직 소비에트 및 홍군만이 전 중국을 무장할 수 있는 지휘자이며, 항일의 유일 정확한 대표자이다’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저우은라이와 예젠잉(葉劍英, 1897~1986) 등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추천해서 김훈은 홍색간부단의 참모장이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앞 둔 1934년 10월, 중앙군사위원회는 1보병학교, 2보병학교 등 4개 홍군학교를 합병해서 홍색간부단으로 개편하고 장정이 끝나면 다시 홍군학교로 운영하기로 했다. 1934년 10월, 김훈은 홍색간부단을 인솔해서 대장정길에 올랐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