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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소련에서 온 혁명 아가씨 오지숙 - 중국혁명을 동경했던 소녀

기사입력 2023.07.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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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한(武漢)군사정치학교(황푸군교 우한분교)에 재학했다는 한국인 수기가 한 편 있습니다. 1932년 8월 발행된 『三千里』 제4권, 8호에 실린 「廣東事變으로 朝鮮軍官九十名戰死記, 武昌女子軍官學校 卒業한 朝鮮人 女子士官 吳智淑 孃 手記」입니다.

     

    이 문장에 대해 편집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동사변 때에 조선인 군관 90여명이 일시에 전사하였다는 숨기엇든 사실이 이제 함께 출전하얏다가 포로 되여 후년 석방된 당년 28세의 묘령의 오지숙 양의 수기로부터 알니어 젓습니다. 오지숙 양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하야 본명을 「올니까요가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소녀시대에 시베리아에 가서 교육을 밧엇고 그뒤 이동휘의 주선으로 상해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다시 여운형 현정건의 조력으로 무창에 이르러 여자군관학교를 2백명 중에서 제17호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맛치고 그러고 곳 여자 사관이 되여서 동료인 90여명의 조선청년장교와 수천의 중국 장졸로 더부러 광동 전장에 출전하엿다가 그만 자기만 적탄에 부상하여 포로가 되고 남은 동지들은 이역만리에서 일시에 명예의 전사를 하엿든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술을 중략한 곳이 만흐나 그 때 생사를 가치하든 오양의 수기인것 만큼 이 일편의 기록은 실로 귀중한 역사적 문헌이 될 것인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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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8월『三千里』 제4권, 8호 표지

     오지숙이름은명단에서누락된것으로사료됩니다.

     

    오지숙이 쓴 문장은 길기도 하고 읽기도 어려워 요약해서 2회 올립니다.

     

    (1) 중국혁명을 동경했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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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오지숙은 중학교 2학년 때 중국혁명이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중국으로 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예루만돕쓰까야라는 3~4백호가 사는 농촌중학교이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토요일, 교실 난로에는 연탄이 타오르고, 칠판 위에는 레닌 초상화, 칠판 양 옆에는 혁명문구와 세계 각국의 생산지표가 여러 점 걸려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 상황을 보고했다. 광둥혁명군이 북벌전쟁의 깃발을 든 지 불과 몇 달 만에 벌써 난창과 상하이를 점령하여 중국혁명이 곧 승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국혁명을 생각하면 오지숙의 가슴은 무거운 납덩이라도 녹일만큼 뜨거워졌다. 그날 밤 부친을 졸라 중국행을 허락받았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1873~1935)가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하이 조선공산당원 여운형(呂運亨1886~1947)을 찾아 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오지숙은 교묘하게 소련 국경지대를 넘고 중국의 수이펀(綬芬) 산차거우(山采溝)라는 곳에서 중국행 기차를 타고 하얼빈, 창춘, 펑톈, 판스를 돌아서 닝커우(宁口)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왔다.

     

    여원형이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 여군 모집시험에 응시하라고 추천해주었다. 전국 각 도시에서 중졸 여학생이 500여 명의 지원했는데 그 중 195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합격자가 발표되던 날, 조선청년과 사관생도 수 십 명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고 오지숙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27년 2월 12일 개학식날이었다. 1기생 여군 100여명과 2기 신입생 195명이 넓은 운동장에 줄을 섰다. 단발머리에 군모를 쓰고 회색 군복에 허리띠를 졸라 맨 단정한 여성 교관이 여학생대의 입장을 지휘했다.

     

    그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송칭링(宋慶齡, 1893~1981), 덩옌다(鄧演達, 1895~1931), 왕자오밍(汪兆銘,1993~1944), 장파쿠이(張發奎, 1896-1980) 같은 인사들이 신입생에게 축사하며 훈화를 했는데 그 중 장파쿠이의 간곡한 강연이 오지숙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 입학식이 끝난 뒤 한 여성단체가 여군들을 황학루(黃鶴樓) 다과회에 초대했다. 쑹칭링은 인사말을 마치고 내빈들을 향해. 우한분교 여군 중 유일한 외국인 오지숙을 소개했다.

     

    매일의 일과는 새벽 5시 기상이다. 15분간 이불을 개서 침대위에 반듯하게 놓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군복갈아 입고 내무검사를 받는다. 하나라도 제자리에 놓이지 않으면 3일간 영창 구류를 당한다. 내무검사를 받고 아침제조와 사격연습이 끝나면 수업이다.

     

    매일 8시간 역사, 수학, 군사과목 등을 배우고 밤 9시 반 취침시간이다. 쑨원주의는 매일 학습하는 필수과목이고, 매주 월요일 아침이 되면 연병장에서 학생과 1만 명의 군중이 모여 쑨원의 유촉을 외우고 3분동안 묵상하고 상급장교의 훈시를 듣는 특별 의식이 있다.

     

    졸업후 오지숙은 소대장직을 수행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동포동지들이 있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었다. 철군으로 불리는 4군에 동포 교관들이 많았다. 북벌전쟁에서 한인 혁명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운지라 국민혁명군 장성들이 서로 한인 교관들을 자기 부대에 영입하려고 애를 썼다. 이에 고무된 한인 혁명청년들은 열광적으로 화북타도를 외치고 내친 김에 조선까지 진출하여 일제를 타도하기를 열망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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