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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소련에서 온 혁명 아가씨 오지숙 - 실현하지 못한 웅대했던 꿈

기사입력 2023.07.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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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7월 말, 학교에 음산한 공기가 흘렀다. 7월 15일 우한정부의 정책이 반공으로 돌아서면서 우한분교 교도단과 학생 4천여 명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학교에는 교도단과 학생 1,700여 명이 남았다. 장파쿠이는 자신의 4군을 2방면군으로 개편하고 학교에 남아 있던 1,700여 명을 자신의 부대로 영입했다. 한인 사관과 생도 200여명은 특별히 갈 곳이 없는지라 대부분 2방면군에 배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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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7월 말 장파쿠이는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토벌한다는 “동정토장(東征土蔣)”을 선포하고 허룽(賀龍, 1896~1969)과 예팅(叶挺,1896~1946) 사령관에게 선봉대를 인솔해서 구강(九江)에 가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했다. 그러나 허룽과 예팅은 구강에서 장파쿠이 사령관을 기다리지 않고 수하의 군인들을 인솔해서 난창(南昌)으로 가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등 중공 지휘부와 연대해 8월 1일 난창 공산당 봉기를 일으켰다.

     

    7월 31일 저녁, 장파쿠이 사령관은 우한 양호서원(兩湖書院)에 남아있던 2방면군 교도단과 우한국민정부 경호단을 인솔해서 선박 5척에 나눠 타고 장시(江西) 구강으로 출발했다. 장파쿠이는 우창을 떠날 때만 해도 난창에서 공산당원들이 봉기를 준비한다는 것을 몰랐다. 8월 3일 정오, 후속 대원들이 구강에 도착해서야 장파쿠이는 교도단들이 탄 모든 선박을 강 가운데 정박시키고 무기를 압수하고 선박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다. 이 날 공산당 교도단들이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장파쿠이는 원래 반공주의자가 아니어서 자신의 수하에 적지 않은 공산당원이 있다는 것을알고 있었다. 장파쿠이는 교도단들을 집결시키고 공산당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보내주겠으니 나오고,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부대에 남으라고 명령했다. 공산당조직은 공산당원으로 정체가 드러난 사람은 비밀리 2방면군에서 철수시키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은 당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2방면군에 남으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다.

     

    교도관들은 며칠동안 배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한인 교도관들 중에도 공산당에 편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지라 2방면군에 그대로 남았다. 장파쿠이는 장제스를 토벌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광둥(廣東)으로 향했다.

     

    오지숙은 위에서 저항하다가 공산주의자임이 폭로되어 무기를 압수당했다. 전향하면 동포 교도관들과 함께 광둥으로 갈 수 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동포들과 헤어지더라도 혼자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동포 교도관들이 위에서 오지숙을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 아래 있을 고국 강산을 굽어보면서 모두들 죽지말고 살아서 칼을 들고 싸워 이겨야 한다는 강철같은 굳은 결심을 고별사로 대신했다. 이국의 풍운에 새까맣게 그을고 골 깊게 파인 검은 얼굴에 큰 줄기 눈물을 죽죽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하는 동포교관들을 보면서 오지숙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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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숙은 홀로 상하이로 가는 배로 갈아탔다. 배는 마치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한 조각 나뭇잎 같았다. 황혼이 점점 깊어질 때 품 속에서 생명처럼 간직해 오던 군관학교 졸업증서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키스를 하고 두 조각으로 찢어 바다에 던지고 난간에 엎드려 울고 또 울었다.

     

    ‘왜 죄 없는 졸업장을 찢었는가?’ 졸업장을 희생시켰다는 애석한 생각이 들면 ‘졸업장은 우한정부가 추진하는 가치없는 일에 종사한 무의미한 결과물’이며 혁명을 배신한 난징정부와 우한정부가 싫어서 졸업장을 무참하게 희생시켰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한인 교도관들은 국민혁명군 2방면군 2영 5련에 배치되었다. 2영 5련의 중공당 조직 책임자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었다. 한인들이 광둥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 17일 장파쿠이와 광서 군벌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용감한 한인 교도단들은 장파쿠이가 정권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장파쿠이 정책은 곧 공산당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27년 12월, 장파쿠이가 광시 군벌을 추방하려고 자오칭으로 나갔다. 12월 11일 새벽, 광저우 병력이 미약한 틈을 이용해 중국공산당은 광저우정권을 탈취하려고 폭동을 일으켰다. 장파쿠이의 주력군이 곧 광저우를 탈환하여 공산당 봉기는 ‘삼일 천하’로 끝났다. 오지숙과 구강에서 눈물로 석별했던 조선동지 중 90여명이 전사했다. 광둥의 거친 황야에서 의지할 곳 없었던 90명 전사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값없이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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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8월『三千里』 제4권, 8호 표지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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