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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무는 황푸군교 6기 입오생이며 혁명한다고 16세에 중국에 와서 평생 중국공산당에 투신한 분입니다. 장시 루이진 중앙소비에트 지역에는 김훈(삐스티) 무정, 최정무, 김홍묵 한인 4명이 활동했는데 그중 한 명입니다.
최정무(崔鼎武, 1910~?)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쌍성자) 하구촌에서 태어난 연해주 이주 한인의 후손입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두 형과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던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어요. 혁명의 덕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집단농장이 생겨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론을 배우면서 계급사회에 대해 조금 눈을 뜨고 보니, 최정무는 조선 해방과 세계 공산주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삼형제들은 모여 앉으면 “세계혁명을 논하고 무산대중을 위해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를 토론하고 고민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공산당에 가입하고 홍군에 입대했습니다.
최정무는 자신의 고민을 이웃에 사는 공산주의자 박우동과 상의했습니다. 박우동은 중국혁명과 조선 혁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중국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곧 조선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1926년, 중국은 북벌 전쟁에 한창열을 올리고, 망국노 되기를 원치 않는 소련, 중국, 조선의 젊은이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하며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한다고 일러 주면서 상하이 조선공산당 책임자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박우동은 상하이에 가면 그에게 전해주라고 손수건도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16세가 되자최정무는 공산청년단 친구5명과 밀수꾼을 따라 우수리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습니다. 상하이는 빈부격차가 무척 심한 자본주의 사회였습니다. 최정무의 눈에는 상하이가 마치 하나의 지옥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태운인력거를 끌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실업자가 많이 보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많았는데 이들은 마치 남의 나라에 와서 무례하게 행패를 부리는 건달로 보였습니다.
최정무는 박우동이 알려준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 손수건을 전달했습니다. 여운형이그 손수건을 약물에 담그니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정무일행을 소개하는 비밀 편지였습니다. 지하 공산당 조직은 최정무에게 인력거와 마차를 수리하는 곳에 일자리를 찾아 주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